불행은 미리 노크를 하지 않고 찾아온다. 갑자기 쓰러졌다는 소식은 대개 평소에 아주 건강해 보이던 사람에게서 들려온다. 마라톤을 시작한 지 한 달 만에 풀코스를 완주했다는 철인, 산에 가면 펄펄 날아다니고 무박이일로 종주했다는 사람이 갑자기 사고가 난다. 늘 골골대고 비실비실하던 사람이 오히려 장수(長壽)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행동경제학에서는 이런 인간의 속성을 '간과된 위험(neglected risk)'이라고 부른다. 작은 위험성도 눈에 보이면 민감하게 반응하는 반면, 눈에 보이지 않으면 큰 위험도 과소평가하는 현상이다. 비행기 사고가 날 확률은 아주 낮지만, 공항에서는 비행 보험이 잘 팔린다. 하지만 강가에 집을 짓고 살면서도 평소에는 홍수에 대비하지 않는다.
전문가라고 해도 크게 다르지는 않다. 2008년에 미국 집값이 30% 하락하리라고 예측했던 투자은행은 단 한 군데도 없었다. 태어나서 지금까지 아파트값이 내려가는 것을 한번도 보지 못한 사람들이 집값 폭락을 예측하기는 어렵다. 모든 투자자들이 확률이 낮고 눈에 보이지 않는 경고 신호는 무시한다.
그러나 눈에 보이지 않는 위험이 더 무섭다. 평소 잔병을 앓던 사람은 늘 더 큰 질병을 경계하기 때문에 큰 사고 없이 오래 살 수 있다. 하지만 늘 정상으로 나오는 건강검진을 뭐 하러 받느냐며 큰소리치던 사람이 막상 죽음의 그림자를 감지하지 못하고 허망하게 당한다. 약을 규칙적으로 먹지 않는 행태가 바로 위험을 간과하는 대표적인 행동이다. 약을 안 먹으면 당장 콧물이 줄줄 흐르고 통증이 심해질 때, 사람들은 약을 잘 먹는다. 하지만 약을 하루 걸러도 당장 후유증을 느끼지 못하는 고혈압이나 당뇨, 우울증의 경우 꾸준히 약을 먹는 환자가 절반에도 미치지 못한다. 하루 거른다고 해서 당장 뇌혈관이 터지거나 합병증이 생기지는 않는다. 그래서 위험을 망각하기 쉽다. 그러나 계속 관리를 잘 하지 않으면 조만간 심각한 상황에 빠진다.
조직에서도 마찬가지다. 평소에 힘들다고 징징대는 직원은 관리하느라 손이 많이 가기는 해도 큰 사고는 치지 않는다. 그러나 면전에서 순종적으로 '네네' 하던 직원, 절대 그럴 리 없다면서 철석같이 믿던 직원이 나중에 뒤통수를 친다.
어느 기업이든 정신건강 검진을 해보면, 나는 전혀 문제가 없다는 사람이 5%쯤 나온다. 최고경영자는 바로 이 5%를 조심해야 한다. 조직에서 독이 되는 사람은 오히려 '나는 스트레스 0점'이라고 자부하는 사람이다. 그들은 자기가 남을 힘들게 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른다. 심지어 자기 내면이 속으로 골병들고 있는데도 인식하지 못한다. 인간이라면 스트레스를 받지 않고는 살 수 없다. 적절한 스트레스는 위험을 알려주는 경고등이다. 그것을 무시하면 안 된다. 나는 문제없다고 자신하던 사람이 질병에 걸리거나 가족관계에 문제가 생겼을 때, 한방에 '훅' 가는 경우가 생긴다.
특히 경쟁적이고 성취지향적인 사람일수록 조심해야 한다. 끊임없이 앞만 보고 달리는 일중독자는 위험 신호를 아예 보지 못한다. 그러다가 반드시 힘에 부치는 날이 온다. 갑자기 힘이 쭉 빠지면서 의욕이 없고 마음이 공허해진다. 인생의 좌표가 흔들린다. 가속 페달을 너무 밟아서 연료가 다 떨어진 셈이다. 소위 '회사형 인간'이 이런 탈진증후군에 잘 걸린다. 과거에 발생하지 않았던 위험성을 무시했기 때문이다.
불과 200여년 전까지 의사들은 부검을 한 뒤 바로 산모의 아기를 받기도 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세균은 출산 직후 산모와 새로 태어난 아기들의 생명을 무수히 앗아갔다. 하지만 현미경으로 세균을 직접 확인할 수 있을 때까지는 아무도 세균이론에 찬성하지 않았다. 아기를 받기 전에 손을 씻어야 한다고 주장했던 헝가리 의사는 동료들의 냉대 속에서 불행한 최후를 맞기도 했다. 요즘은 손씻기의 중요성을 알고 병원 전체에서 직원의 손씻기를 강조한다. 그래도 눈에 보이지 않는 위험은 통제하기 힘들다.
위기를 예견한 사람을 외롭게 만들면 안 된다. 혼자 다수와 다른 목소리를 내기란 힘들다. 보이지 않는 위험을 감지하고 예방하는 시스템이 필요하다. 미국 존스홉킨스병원에서는 단순하게 5단계 체크리스트를 만들고, 의사나 간호사, 행정직원이 직급과 직위에 상관없이 서로 점검하도록 절차를 만들었다. 그 결과 병원 감염을 획기적으로 줄이고 세계를 선도하고 있다.
2011.10.29 우종민·인제대 서울백병원 교수 / 조선일보 W-Biz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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