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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강혜선 "나 홀로 즐기는 삶"

흔적. 2011. 1. 18. 13:26

 

나 홀로 즐기는 삶

강혜선 지음|태학사|411쪽|1만6000원

1766년 2월 북경의 한 주점(酒店)에서 조선과 청나라 선비가 '술 주(酒)'자를 놓고 작은 실랑이를 벌였다. 조선 사신 일행으로 북경을 찾은 김재행이란 선비에 대해 술친구로 친해진 청나라 엄성이란 선비가 인물평을 써줬는데 여기에 '酒'자가 너무 많은 것이 발단이었다. 김재행은 좀 빼달라고 하고 엄성은 "그것을 빼면 문장 맛이 떨어진다"며 옥신각신한 것이다. 김재행이 그렇게 매달린 것은 당시 조선에 금주령(禁酒令)이 내려진 상태였기 때문이었다. 그렇지만 이 실랑이의 끝은 결국 또다시 술자리였다. 필담(筆談)으로 이어진 이 에피소드는 동석했던 홍대용이 글로 남겼고, 김재행은 두고두고 당시의 우정을 그리워했다.

강세황이 1747년 여름날 처남인 해암 유경종의 현곡(玄谷) 청문당(淸聞堂)에서 벗들과 모여 시를 읊고 거문고를 타면서 풍류를 즐기는 장면을 그린‘현정승집도(玄亭勝集圖)’. /태학사 제공

조선 선비들이 남긴 삶에 대한 태도와 일상생활에 관한 글을 모아 엮은 이 책은 당시 지식인 사회의 내면을 잘 보여준다. 한국한문학을 전공하는 저자(성신여대 교수)가 고른 인물은 모두 14명. 허목 강세황 홍대용 박지원 안정복 정약용 등 유명인도 있지만 신정하 김려 심능숙 신유한 등 덜 알려진 인물도 망라됐다. 이들은 그림을 그리고, 집을 짓고 채소와 나무를 가꾸며, 벗·가족들과 편지로 정을 나누고, 청나라 선비와 교유하며 새로운 문물을 수집하는 등 다양한 방식으로 '홀로 즐기는' 삶의 경지를 보여준다. 그래서 이 책에선 희로애락(喜怒哀樂)을 그대로 노출하는 '생활인 선비'들의 민얼굴이 드러난다.

젊어서부터 수차례 자화상(自畵像)을 그릴 정도로 자신을 늘 돌아봤던 강세황(1713~1791)은 50대 때 느닷없이 아들에게 "내 제사상에는 술을 올리지 말라"는 편지를 보낸다. 평소 술을 좋아하지 않던 강세황이 우연히 벗과 이야기를 나누다 문득 생각이 나자 잊기 전에 편지를 쓴 것이다.

선비들은 누추한 집과 그 주변의 별로 특별하지도 않은 풍경까지 이런저런 이름을 붙여가며 사랑했고, 즐거움의 요소로 삼았다. 허목(1595~1682)은 경기도 연천의 집을 '곱사등이집'이란 뜻의 '구루암(�Y��庵)'이라 이름붙였다. 집이 하도 좁고 낮아서 허리를 구부리고 드나들어야 한다고 해서 그렇게 불렀지만 그는 자기 집의 아름다움을 3월부터 눈 내린 시절까지 열 가지로 읊었다. 홍대용(1731~1783)은 청주 선산 부근의 집 '애오려(愛吾廬)'를 여덟 가지 아름다움으로 구분해 청나라 선비들에게 자랑했고, 안정복(1712~1791)은 8칸짜리 띠집을 '분수에 맞는 집'이란 뜻의 '분의당(分宜堂)'이라 부르며 '책읽기, 밭갈기, 나무하기, 낚시하기, 약초 재배, 채마밭 가꾸기, 거친 밥 먹기, 베옷 입기' 등을 분수에 맞는 일로 꼽았다. 진해에 유배됐을 때 경험을 바탕으로 '우해이어보(牛海異魚譜)'를 남긴 김려(1766~1822)는 유배를 마치고 서울 삼청동 셋집에서 살면서 전문가 수준으로 살구·모과·곰취 등을 재배했고 고추와 관련해서는 전문가 못지않은 요리법을 한시로 남겼다.

가족에 대한 정(情)이 듬뿍 묻어나는 글도 있다. 정약용이 술 잘 마시는 둘째아들에게 보낸 편지엔 "어찌하여 글공부에는 이 애비의 성벽(性癖)을 계승하지 않고 술만은 이 애비를 넘느냐? 이것은 반가운 소식이 아니다"는 걱정이 가득하다. 어려서부터 총명해 자기가 직접 '논어'를 가르쳤던 딸과 외아들을 한꺼번에 잃은 김창협(1651~1708)은 제문(祭文)에서 "나는 너희들을 곡(哭)한 이후 차마 (함께 살던) 옛집으로 돌아갈 수가 없었다"며 눈물짓는다.

조선 선비들의 발자취를 직접 답사하고 다양한 글을 골라 뽑은 저자의 노력이 책 곳곳에서 느껴진다. 또한 책을 읽다 보면 그때나 지금이나 별다를 것 없는 세상에서 어떻게 인생을 사랑하며 살아야 할지를 생각하게 된다. 책 제목은 강세황이 70세에 남긴 자화상에 쓴 글 "세상 사람이 어찌 알겠는가?

나 홀로 즐길 뿐[人那得知 我自爲樂]"에서 따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