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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그림 - 모딜리아니 Amedo Modigliani(1884~1920)

흔적. 2012. 3. 25. 11:41

막스 쟈콥의 초상

막스 쟈콥은 브르타뉴 출신의 시인이자 미술 비평가로 당시의 파리 화단을 형성했던 주요 인물의 하나이다. 그도 모딜리아니의 예술을 사랑햇으며 폴 기욤이라는 화상을 그에게 소개하기도 했다. 그러나 즈보르스키처럼 관대한 이해자는 아니었으며, 얼마 간 이재(理財)에 바른 시인이었다고도 전해지고 있다. 모딜리아니가 비아트리스와 동거하고 있을 때 자주 찾아 왔던 쟈콥은 모딜리아니의 무절제한 생활을 염려했고 그래서 제법한 화상을 그에게 소개하여 건실한 작가 생활을 영위하도록 권고한 것도 쟈콥이었다고 한다. 모딜리아니는 이럴 때마다, '농담 말게' 하면서 이 연상의 이해자를 어렵게 만드는 게 예사였다고 한다. 쟈콥은 비아트리스를 모딜리아니로부터 떼어 놓으려 했었기 때문이었다. 이 작품에서 쟈콥은 40이 넘은 대머리지만 모델의 지성과 감수성이 부드러운 표현으로 묘사되어 있다.

 

 


빌호르스키의 초상

이 작품의 모델이 취하고 있는 포즈는 사람이 마음을 가다듬고 앉을 때 보이는 그러한 유형을 보여주고 있다. 따라서 이러한 자세를 회화로 표현할 때 자칫 굳어진 포즈로 재현될 우려가 있다. 가령 표현되지 않는 리얼리티는 리얼리티가 아니라는 말이 있는 것처럼, 사상은 그 자체로서 드러나는 게 아니라는 것을 이 작품은 회화적으로 증명해 주고 있는 좋은 예가 되고 있다는 뜻이다. 미술은 그것을 창조하는 미술가의 마음의 굴절을 통해서 나타나며 그래서 성격적인 것이 된다. 미술이 먼저 있고 다음으로 사람이 그것을 본뜨는 게 아니라 사람이 먼저 있고 다음으로 미술이 그 사람을 본뜬다는 이야기이다. 이 작품은 이러한 퍼스낼리티로서의 모딜리아니의 표지가 빌호르스키에 의해서 여과된 변형이라고 해야겠다.

 

 


모자를 쓴 여자

미남자였던 모딜리아니는 몽마르트르와 몽파르나스의 처녀들의 가슴을 설레 이게 했었다는 것은 그의 전기의 어디서나 발견된다. 몽마르트르의 라팽 아질의 카페에서 그리고 망파르나스의 로톤드나 도움의 카페 같은 데 앉아 있는 모딜리아니의 모습을 처녀들은 빠져들 듯이 바라보는 것이었다 한다. 이 작품의 모델인 로롯트라고 불렸던 파리잔느는 얼마간 바람기들은 용모를 띠고 있으며, 양가집의 처녀 같지는 않다. 필경 술집 같은 데서 활달하지만 내던지듯 인생을 살아가는 여성이었는지도 모른다. 모딜리아니의 여성상인 깊고 우수에 찬 여느 침정으로서의 표정은 이 모델의 경우 어디에도 없다. 다만 로롯트의 왼쪽에 그려진 꽃은 모딜리아니가 마음먹고 정물화를 그렸다면 훌륭한 작품을 그렸으리라는 아쉬움을 남겨 주게 한다.

 

 


블론드의 여자(르네)

르네라는 이름은 한국의 옥순이처럼 프랑스 여성의 이름이며, 파리의 여기저기에 르네가 살고 있다. 이 작품은 그러한 한 프랑스 여성의 초상화이면서 모든 르네의 초상화이기도 하다. 이 작품은 점차로 무르익어 가는 모딜리아니의 원숙한 기량을 나타내고 있으며 모델을 포근하게 포용하는 표현력이 넘쳐 흐르고 있다. 한편 이 작품의 모델인 르네는 키슬링의 처이며 모딜리아니의 미술을 순심으로 이해했던 모델 가운데의 한 사람이었다. 키슬링은 폴란드 출신의 유태인 화가였으며 나중에 프랑스 국적을 얻게 되지만 모딜리아니는 이 무렵 키슬링의 아틀리에에서 자주 제작했었다. 필경 이 작품도 키슬링의 아틀리에에서 제작된 게 아닌지...

 

 


쟈크 립시즈 부처의 초상

이 작품은 모딜리아니가 파리에 정착한지 꼭 십년이 되는 해에 제작한 것이다. 그의 본령이 무르익기 시작하던 무렵의 일품이다. 전하는 말로는 이들 립시즈 부처가 자신들의 초상화를 부탁했을 때 모딜리아니는 한 번에 10프랑을 요구했다고 한다. 다음날 모딜리아니가 찾아와서 놀라울 만큼 빠른 속도와 정확도로 이들 부처의 데생을 여러 장 그렸고 마지막으로 이 작품과 같은 구도로 결정되었다고 한다. 모딜리아니는 이들의 결혼 사진을 본 떠서 이러한 구성으로 작품을 완성했는데, 붓을 놀리던 손이 자주 술병 있는 곳을 더듬더라고 한다.

 

 


한카 즈보로스카의 초상

폴란드의 옛 귀족인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 난 즈보로스카는 1914년 유럽 대전이 발발하던 해에 파리로 피신했으며, 그후 파리장들은 그녀를 프랑스 식으로 안나라고 불렀다. 모딜리아니의 최상의 이해자였던 레오폴드 즈보로스키를 알게 된 그녀는 이 동포에게 시집 가게 되며 앞으로 모딜리아니에게는 없어서는 안 될 부부가 된다. 이 작품은 이들 부부가 모딜리아니를 알게 된 일년 후에 그려진 것으로 병약한 몸매의 즈보로스카였지만 그녀의 마음씨 고운 자태가 모딜리아니의 심상을 통해 불가사의할 정도로 우아하게 표현되어 있다. 기품 있게 흐르는 목의 사선과 맑게 가라앉은 얼굴 표정이 검은 의상과 검은 머리의 대비를 통해 긴장된 구도로써 표현되어 있다.

 

 


샤임 스틴의 초상

러시아의 리토아니아 출신은 스틴도 역시 유태인 미술가였으며, 1911년 파리로 나와 동국인이자 유태인인 샤갈과 모딜리아니와 친교를 맺는다. 남 프랑스의 세레라는 지방에 일시 정착하여 강렬한 원색만으로 뭉개듯 그리는 그의 광열적인 감정의 독자적인 작풍은 당시의 파리의 화단을 놀라게 한다. 이러한 그의 화면과는 정반대로 그는 투박하리만큼 순정의 사람이었다고 하며, 모딜리아니는 이러한 그의 순심에 깊은 애정과 우정을 느꼈다고 한다. 쟌느 모딜리아니는 아버지의 이 작품을 다음과 같이 해석한다. '포즈는 조용하게 가라앉아 있으며, 높은 코와 두터운 입술은 두드러 지지만, 고뇌로 차 있는 눈길이 모델을 비극적일 만큼 고독하게 표현하고 있다.' 고...

 

 


큰 모자를 쓴 쟌느 에퓨테른느

여학생처럼 청순한 처녀가 몽파르나스의 로톤드(카페 이름)에 드나들기 시작했다. 눈동자도 머리 빛도 밝았던 이 처녀는 모딜리아니 등의 예술가들이 모여 앉아 떠들고 있는 쪽을 조심스럽게 바라보기도 했다. 들리는 말로는 그림 공부를 해보려고 몽파르나스에 온 것이라고 들 했다. 얼마 후 이 청순한 처녀인 쟌느 에퓨테른느가 모딜리아니와 서로 팔짱을 끼고 몽파르나스 거리를 지나가는 정경을 사람들은 목격하게 된다. 드디어 모딜리아니도 행복을 잡았구나 하고 사람들은 생각했다. 라 . . .벨... 그녀는 모딜리아니의 생의 반려가 되며 앞으로 삼 년간 로톤드의 맞은 편 그랑 쇼미 엘거리에 셋방을 얻어 같이 살게 된다. 한때나마 안정된 시기가 찾아오며 모딜리 아니의 독자적인 표현 양식은 급속도로 만개하게 된다.

 

 


반 뮈덴 부인의 초상

이 작품의 구도는 회화의 자율적인 운영만으로 잡혀진 것이라기보다 모델인 대상의 인간과의 교류를 통해 독특한 경지를 보여 주는 화면이다. 가령 크로드 로와는 이 작품을 다음과 같이 해석하고 있다. '모델은 흔히 있는 의자에 앉아서 긴장을 푼 상태의 가을 날씨처럼 가라앉은 자세를 보여주고 있다. 사람은 여기서 100퍼센트의 이탈리아 적인 유화한 풍취를 찾아볼 수도 있겠고 또는 100퍼센트의 현세적이고 식물적인 무관심을 찾아볼 수도 있겠으며, 혹은 온화한 몽상적인 육감을 맛볼 수도 있겠다.' 는 것이다. 이러한 평가는 모딜리아니의 모델들이 모두 틀에 박힌 듯한 하나의 유형으로 그려졌다는 이른바 매너리즘으로만 간주될 때 야기되며, 미술은 그것을 느끼는 사람의 태도 여하로 결정된다는 관념론자의 경우를 대표한다 하겠다.

 

 


앉아 있는 裸婦

모딜리아니가 나부를 그리기 시작한 것은 1916년경부터이며, 그가 죽기 전의 1919년 경까지 적지 않은 작품을 남겨 놓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의 모델이 된 나부들은 앞에 소개한 안나 즈보로스카, 비아트리스, 쟌느 에퓨테른느 등이었다고 한다. 1917년 말인 12월 3일부터 30일까지 모딜리아니로선 평생 처음이자 마지막인 개인전을 벨트 에일 화랑에서 열게 된다. 그런데 초대날 그의 나부상들이 너무 관능적이어서 풍기 문란이란 죄목으로 경찰의 신세를 지게 되며 결국 다섯 점의 나부가 철거되는 스캔들이 일어난다. (모딜리아니와 화랑의 여주인은 일시 체포된다.) 검은 배경 위에 모델의 곡선은 무겁게 흐르고 있으며, 다른 나부들과는 달리 삶의 애환을 짙게 풍겨 주고 있다.

 

 


젊은 농부의 초상

모딜리아니의 나부상은 대략 35점 가량 그려진 것으로 추산되고 있는데 특히 1917년에 그 대부분이 제작되었다고 한다. 상상 해 보건대, 14살이나 손아래인 쟌느 에퓨테른느와의 사랑이 그를 생명감 넘치는 화가로 다시 재생시켰고 이러한 활기가 그로 하여금 정력적으로 많은 나부들을 그리게 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런데 점차 그의 관심은 온건한 모델에 대한 조용한 애정으로 변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조용한 애정의 대상이 되는 모델들은 여기서의 작품처럼 일상적으로 대하는 생활 주변의 표정들이다. 비록 그들의 인생은 행복한 게 아닐는지도 모르지만 그러나 인간성의 본질적인 아름다움이나 선량함의 강력한 증인들이라고 모딜리아니는 믿었던 모양이다. 이 작품은 그러한 모딜리아니의 마음씨를 나타내고 있으며, 선량함을 표지한다 하겠다

 



서 있는 裸婦

모딜리아니의 다른 나부와는 달리 이 서 있는 알몸의 여성은 잔잔한 정감이 마치 여울물의 흐름같은 파문의 무늬로 숨쉬는 것만 같다. 그것은 여체가 갖는 생명의 비의를 들려 주는 짧고 낮은 소토보체인지도 모른다. 이것은 오히려 예술의 신비라고 해야겠다. 금새 없어질 것만 같은 아쉬움의 청순함 이라고나 할까. 모딜리아니에게 있어서 여자의 나체란 단도 직입적인 관능의 외모도 아니며 여러 가지 기복으로 무겁게 덩어리짔는 복잡한 조형도 아니며 그것을 통해서 감지하게 되는 생의 풍요 혹은 그 찬미였는지도 모른다.

 

출처 : 아름다운 추억(부산.경상)
글쓴이 : 에바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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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이 긴 것이 특징인 모디 아마 아프리카 원조조각의 영향을 받은 듯

혹자는 모디가 미술사상 가장 잘생긴 화가라고 평하기도

모디가 죽은 이틀 후 친정집 5층 아파트 창문에 몸을 던져 자살한 잔느는 임신 8개월째.

가장 가슴에 남는 말은 "천국에서도 당신의 모델이 되어 드릴께요." 잔느가 모디에게. - 카스테라 說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