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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세스의 느슨한 결합

흔적. 2009. 10. 10. 17:23

프로세스의 느슨한 결합 즉 다양한 경우의 수를 생각하며 개발한다는 것은 업무에 정통하다는 것이며, 좀 더 비약적으로 이야기하자면 동양화에 있어서 여백의 개념이 아닐까 한다.

잘은 모르지만 이런것이 있을 수 있다는 추론을 공간으로... 見者의 마음을 위해서.

나역시 개발할때는 협업보다 더 많은 업무를 파악한 후에 개발에 임하고자 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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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 전 글로벌 부품업체의 한국 생산회사에 있었던 일이다. 전사적자원관리(ERP)를 도입하려고 하는데 CEO가 계속 반대했다. 이유를 알고 보니 유럽에 있는 그룹 내 생산회사들의 평균 조업도가 70% 수준인데 당시 이 회사는 조업도가 100%가 넘었다. 혹시 ERP를 들여오면 조업 수준이 저하되지 않을까 우려했던 거다. 결국 실무자들이 조업 수준이 저하되면 모두 사표를 쓰겠다고 서약하고 나서야 ERP 구축 프로젝트를 할 수 있었다.

 

그럼 유럽의 생산회사들은 왜 조업수준이 낮았던 것일까. 당시 생산회사들의 핵심성과지표(KPI)는 생산원가였다. 생산원가를 낮추려면 생산계획을 최적화해야 한다. 이 회사들은 생산계획을 최적으로 유지하기 위해 생산 주문을 3개월 전에 마감해 버렸다. 결국 단납기 주문은 받지 못했고 그 결과로 조업수준이 전반적으로 떨어지기 시작했던 거다. 그럼 한국은 왜 조업수준이 높았을까. 예상하는 것처럼 ‘가져와, 만들어 줄께’식이었다. 그렇다보니 조업도가 100%를 넘을 수 밖에 없다. 이 회사는 그룹 본사로부터 최우수 생산회사로 표창도 여러 번 받았다. 실적이 좋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ERP를 도입한 후에는 과연 어떻게 됐을까. 예상과는 달리 조업 수준은 저하되지 않았다.

 

한국의 조선 산업은 현재 세계 1위다. 과거 세계 조선 산업을 장악했던 일본 조선사들은 최고의 생산효율을 유지하기 위해 선박 유형별로 표준 모델을 미리 만들어 두고 선주가 배를 주문하면 표준 모델 중에서 고르게 했다. 선주가 배의 일부를 변경하려면 상당한 추가 금액을 지불해야 했다. 하지만 한국 조선사들은 선주의 다양한 요구를 받아들였다. 그럼에도 빠른 납기와 낮은 원가를 실현했던 이유는 뭘까. 이는 조선 산업이 설계, 구매, 생산(또는 건설)을 동시에 진행하는 주문설계 생산 방식(engineer to order)의 특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특성은 전제 조건이 완전하게 확정되지 않은 상태에서 다음 조치를 해야 하는 상당히 모호한(복잡한 것과는 다른) 상황을 만든다. 개인적으로 한국 사람들이 이런 모호한 상황을 다루는데 탁월한 능력이 있다고 본다.

 

개인적인 경험에 의하면 이런 특성은 국내 산업 여러 곳에서 발견된다. 국내 건설사들 사이에서 풀리지 않는 숙제 중의 하나가 EVM(Earned Value Management)이다. 공정의 흐름과 원가의 흐름을 연계해 관리한다는 사상은 매우 교과서적이고 우수한 논리다. 하지만 대부분의 한국 건설사들은 이 부분을 다소 느슨하게 관리한다. 이는 서구 방식(한국 방식과 대비한다는 목적으로 표현)인 다양한 경우의 수를 반영해 정교하게 고안된 프로세스에 의해 확보되는 유연성과는 다르다. 굳이 표현하자면 기계와 인간의 역할 비율이 다르다고 할 수 있다.

 

기존에 들여왔던 애플리케이션 패키지들이 대부분 실패한 데 반해 ERP는 우리나라에서 큰 성공을 거뒀다. 이처럼 ERP가 한국에서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만큼 한국 사람들의 특성에 잘 맞았기 때문이라고 본다. ERP의 구현은 기본 프로세스를 중심으로 시스템의 골격을 잡은 후에 다양한 경우의 수를 하나씩 추가해 가면서 시스템을 보강하는 프로토타이핑(prototyping) 방식을 사용한다. 이 때 발생 가능한 경우의 수에 대해 서구 방식은 ‘아래에 열거한 경우 외에는 없다’는 식으로 접근하지만 우리나라는 ‘아래 열거한 경우가 주로 발생하는 예외 사항이고 그 외에도 발생 가능하다’로 생각한다. 어떤 경우가 더 있냐고 물어 보면 그걸 어떻게 다 아냐고 반문한다. 이런 사상이 결과적으로 프로세스와 프로세스, 액티비티와 액티비티 사이의 주요 절점들을 약간 느슨하게 연결하게 한다.

물론 어떠한 경우든 허용한다는 건 있을 수 없다. ERP는 사용자가 원하는 대로 시스템을 구현할 수 있도록 하면서 넘어서는 안 되는 최저한도를 성공적으로 방어해 줬다. 예를 들면 영업의 매출과 회계의 매출은 항상 같아야 한다든지, 소일정은 중일정 범위 내에서 변경 가능하다든지, 신청서(material request)가 없으면 구매주문서(purchase order)를 낼 수 없다든지 등을 들 수 있다.

 

1989년 하멜(Hamel)과 프라할라드(Prahalad)는 하버드 비즈니스 리뷰에 기고한 전략적 의도(Strategic Intent)라는 논문에서 자원이 빈곤한 동양의 기업들이 세계적 기업으로 성공한 이유를 보이지 않는 정신적인 힘으로 설명했다. 서구적인 설명이라고 생각된다. 하지만 실행 측면에서 일어나는 불가사의한 속도는 완전하게 설명되지 않았다. 원칙과 기본을 지키면서 사람의 판단이 개입할 수 있는 프로세스의 느슨한 결합이 존재하는 것이다.

경영환경의 변화가 워낙 극심하다 보니 요즘은 빠른 대응력이 핵심 요인이다. 애플리케이션 시스템은 1차 목적인 성능 향상을 위해 정교하게 설계되고 구현된다. 사용자 매뉴얼이 곧 업무 매뉴얼이고 주어진 역할을 수행하지 않을 경우 곧바로 문제가 생기도록 설계된다. 하지만 상황 변화에 대한 대응력은 근본적으로 시스템에서 나오는 게 아니다. 기업 활동이 본질적으로 시스템에 맡겨질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다. 업무 시스템은 점점 더 복잡하고 정교해지겠지만 원칙이 유지되도록 시스템으로 강제하는 것과 대응력 확보를 위해 프로세스를 느슨하게 결합하는 것 간의 적절한 배합이 점점 더 중요해 지고 있다. 여전히 철학과 자세가 더 중요한 것이다.

 

2009.07.19 전자신문 / 권혁창 SK건설 상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