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명-자연 그리고 성性의 이미지화
박영택(경기대교수, 미술평론)
모든 그림은 결국 자기 관심의 표명이다. 자신이 흥미를 갖고 있지 않은 것을 구태여 그릴 이유가 있을까? 어떤 것이 미술의 문제라고 규정되니까 혹은 그림이란 특정 대상, 주제를 다루는 것이라고 믿고 그것을 그린다고 말할 수 있을까? 아니면 유행되는 경향이나 트랜드를 따라서 그린 다고 할 수 있을까? 그렇기 때문에 그린다면 그것은 그림이 거짓이거나 혹은 삶이 위선적이라는 말에 다름 아니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주변에서 그림/작업이라고 말해지는 것들이 상당수 자기로부터 연유하지 않고 자기 밖의 관습에 견인되어 이루어지는 경우를 자주 본다. 좋은 작가들은 그림을 빌어 자기 관심사와 흥미를 이미지화한다. 그것이 미술의 길이고 작가의 삶이다. 그림은 자기 삶에서 유래한 모든 것을 기술記述하는 일이다.
그림 그리는 행위를 통해 그 기술을 이루어진다. 물론 그 기술은 우회와 은유, 상상력과 환영에 힘입고 고도의 수사에 감싸여진다. 그림의 그 독백은 상당히 내밀하고 그러면서도 신랄하다. 의식과 무의식의 지층을 오가며 작가들을 화면 위로 모든 것을, 가능한 발산한다. 관습적인 기존 언어의 강제성에서 풀려나 스스로의 독백과 방언 같은 그림이 힘 있는 그림이다.
물감과 붓을 이용해 주어진 납작한 사각형의 화면에 그리는 일, 쓰는 일이 회화다. 회화는 자신이 욕망하는 대상을 물질화시키는 일이자 그것을 외화 시키는 일이다. 그것은 물감이라는 질료와 붓에, 전적으로 의존한다. 따라서 그림은 그 물성이 표정을 지니고 언어처럼 다가오고 독자적인 몸을 성형하는 일이다. 동시에 붓질로 그림 그리는 이의 마음이 표정과 감정의 진폭, 섬세한 신경의 섬망을 유연하게 펴는 일이고 자유자재로 마음의 상황을 끌고 다니며 새기는 일이다.
결국 그림은 ‘색을 지닌 물감의 물성의 상황, 붓질의 레토릭’이다 라고 단순화해서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여간 김대명의 그림을 처음 보는 순간 우선적으로 붓질과 물감의 질료성이 이미지와 함께 다가왔다. 그것은 특정 대상의 재현이나 사실적인 묘사에서는 분명 벗어나 있지만 순수한 물성과 붓질의 흔적, 작가의 신체성만으로 마감되는 추상은 아닌 그림이다. 여전히 이 작가는 외부세계의 대상을 끌어들이고 그것을 자기의 감정이입에 따라 색채와 붓질을 강조해서 표현하고 있다. 아울러 표현되기 어려운 것은 여러 상징적 기호에 의존해서 자기만의 독백 같은 문장, 화면을 만들고 있다는 느낌이다. 그것은 표현주의 회화와 미로의 그림에서 보여 지는, 기호로 이루어진 초현실적인 화면 구성을 연상시킨다.
작가들은 그림을 통해 자신의 몸 안과 심리 속에서 부유하고 선회하는 것을 이미지화시키고 대상화시켜 거리를 만들고 그것을 다시 들여다보고 독해한다. 혹은 자기의식과 육체에 스미고 절여진 것들을 추출해내서 상像을 만들어준다. 몸을 만들어 주는 일이다. 그로인해 몸에서 분리된 또 다른 몸이 만들어진다. 몸은 보여 지는 외형과 결코 보여 지거나 말해지기 어려운 또 다른 것들로 가득하다. 사실 현대미술이 주된 대상으로 삼아 애를 쓰는 것은 후자다. 말해지거나 쓰여 지기 어려운 것을 이미지화하고 질료화 하는 것 말이다. 김대명의 그림은 원초적인 낙서와 근원적인 중얼거림처럼 발설된다. 그의 그림은 자신의 모든 것을 언어화하는 충동이기도 하다. 그런 생각이 든다.
김대명의 그림은 자신이 감동하고 욕망하는 것을 그렸다. 그리고자 했다. 그것은 그림 이전에 본능적이고 시원적인 언어욕구와 닮았다. 아니 보편적인 인간이 자연스레 갖는 감정과 결부된 문제일 것이다. 그래서 그의 그림은 그림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문장 같고 중얼거림 같고 낙서 같다. 자연에서 받은 벅찬 감동을 이미지로 표현하고 싶고 욕망하는 몸을, 그 몸에 대한 여러 감정을 그리고 싶은 것이다. 그것은 미술의 문제이기 이전에 사실은 감정을 지닌 인간의 항구적인 문제에 관련되어 있다.
김대명의 그림은 모두 자신의 몸/정신이 갈망하는 대상으로 제한되는 데 그것은 물질적 실체인 몸이라는 생리적 구조가 부정하기 힘든 욕망의 대상의 이미지화이고 그것이 자기 식으로 번안되어 나타난다. 한편 또 다른 것은 자연이라는 거대한 세계, 웅장하고 숭고한 감정을 자아내는 대상에서 느끼는 벅찬 감흥의 표출에 관련되어 있다. 두 가지 모두 구체적인 현실세계에서, 몸으로 겪어낸 생의 흔적이자 결과일 것이다. 그것은 미술의 문제이기 이전에 또한 삶의 문제기이기도 하고 좀 더 단순화하자면 인간의 기본적인 정서와 감정에서 연유하는 것이기도 하다.
김대명의 그림을 보면서 나는 그 두 가지 세계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독학의 작가인 그는, 기존 미술계의 공통된 어법이나 관습의 힘에서 비교적 자유로워 보이지만 동시에 여전히 보편적인 미술의 소재를, 오히려 더 적극적으로 다루고 있다는 생각이다. 크게 나누어 보자면 여성 누드를 통해 아름다움과 성에 대해 발언하고 있고 다른 하나는 자연 풍경을 빌어 그 미적 대상의 경이로움과 감동을 ‘표현’하고자 한다. 이 주관적인 표현정신은 그의 작업에 일관되게 나타난다. 그는 묘사하는 게 아니라 무엇인가를 표현하고 발언한다. 그에게 물감과 붓질은 표현하기 위한 수단이지 다른 것이 아니다. 짙은 단색으로 마감된 바탕에 짧게 단속적으로 쳐나간 붓터치가 모종의 이미지를 강렬하게 안긴다. 단순하고 대담한 이 붓질은 대상을 간추려 떠내면서 그 대상을 접한 작가 자신의 느낌을 생선의 비늘처럼 ‘파득거리며’ 전달한다.
그의 대부분의 그림은 짙은 붉은 색이나 검정, 청색 등의 색상을 단호하게 깐 화면 바탕에 짧게 끊어 치듯 그어나간 간략한 붓질로 대상을 간추려내는 편이다. 그 대상은 한결같이 산, 바위와 파도, 누드 등이다. 더러 정물도 있고 일상의 비근한 정경도 눈에 띄지만 그가 일관되게 그려내고 있는 것은, 크게 나누어 자연풍경과 여성의 누드다. 이 특정 소재는 반복해서 다루어진다. 더러 정물이나 다른 풍경들도 있지만 대부분은 숭고함을 자아내는 자연의 위용과 아름다움에 대한 감동을 전달하고자 하는 그림과 벌거벗은 여성의 몸에 대한 관찰과 그에 대한 여러 상념을 기술한 그림으로 대변된다.
여기서 여성누드는 여성 몸의 재현과는 다소 무관해 보인다. 그는 누드를 소재로 하지만 그것은 인체 자체를 미적대상으로 관조하거나 그것을 기술적으로 재현하는 일에 관심이 있기 보다는 여성이라는 존재, 여성의 성에 대한 개인적인 관념을 표출하기위해그 몸을 끌어들이고 있다는 생각이다.
자연과 누드를 표현주의풍으로 그린 그림을 제외하면 나머지 그림은 누드를 주 소재로 위치시키고 나머지 주변에는 산과 해, 달, 그리고 새와 성기를 연상시키는 형상들 및 모호한 기호들이 범람하고 흘러내리는 그림들이 많다. 그것은 서술적이고 이야기성이 강한 그림이다. 반복되는 기호들과 이슬람 문자를 닮은 선들, 그리고 위아래로 흘러내리는 듯한 선, 정자를 연상시키는 형상 등으로 이루어진 묘한 그림이다. 여성 누드와 함께 화면 주변에 알 수 없는 기호, 상형문자 같은 것들을 ‘방사’한다거나 남성의 성기나 새, 해와 달, 혹은 문자꼴의 흘림 같은 것으로 채워나가고 있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서술에 대한 욕망이자 그 몸과 결부된 여러 상념을 기호화하는 과정에서 출현한 것들일 것이다. 이 상징적 이미지들이 무엇을 이야기하는지 알기는 어렵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성에 대한 이야기일 것이다. 여자들의 몸은 대개 고개를 숙이고 앉아있거나 누워 있는 편이다. 보편적인 누드화에서 보는 자세다. 비교적 다채로운 포즈를 취한 인물 주변으로 여러 다양한 기호들이 침입하듯이, 공격하듯이 에워싸고 있다. 여성을 향한 정자들의 질주이자 성에 대한 욕망 같기도 하다.
그가 그림을 그리는 방식은 좀 특이한 데 우선 강렬한 색상으로 바탕을 메꾼 후에 그 위에 대담하게 축약된 붓질을 얹혀놓아 모종의 이미지를 연상시킨다. 그것은 단색의 평면에 꿈틀거리는 붓질의 생명감을 박동 치듯 올려놓는 일이다. 몇 번의 붓질로 간략하게 대상의 요체를 걷어 올린 그림이자 순간적으로, 즉흥적으로 마감된 그림이란 느낌이다. 이 짧은 터치의 신속한 흐름은 순간적인 인상을 걷잡아 내고 있다는 인상을 준다. 바로 이런 식의 그리기가 김대명의 특징인데 그것은 거의 본능적인 정서와 직관적인 감정의 드러냄을 고스란히 올려놓기 위한 방편이다.
아울러 상당히 간소화된 조형방법은 이미 칠해진 바탕 위에 그와 대비되는 강한 색상들을 툭툭 얹혀놓으면서 분산되고 구별되는 색면(붓질)들 스스로가 강렬한 생명체처럼 살아나게 한다. 사실 그가 사용하는 색채의 수도 제한적이다. 블랙, 화이트, 레드, 블루, 그린 등 기본적인 원색만으로 그림을 그리고 있으며 다른 색과 섞지 않고 원색 그대로를 올려놓고 있다. 또한 붓질 역시 직설적으로 그어나가는 행로를 따른다. 그것은 거의 드로잉적이다. 쓱쓱 문지르듯이 칠해나간, 그려나간 붓질은 대상에서 받은 감흥을 날것으로 건져올리면서 이를 즉물적으로 질료화한다. 색채화한다. 오로지 명암으로만 구분되고 색상의 차이로만 구획된 대상은 강한 색채, 분방한 붓질, 대상의 요체로서만 자존한다. 그로인해 생생한 붓질과 물감의 질료성 자체가 자연, 누드의 생명체와 동일하게 약동하는 어떤 상황성을 흘려놓고 있다는 인상을 준다.
나로서는 풍경보다도 여성누드를 표현주의적으로 그려나간 일련의 그림들이 눈에 들어온다. 여성의 하반신에만 초점을 맞춘 몇몇 그림들은 상당히 감각적인 묘미로 반짝인다. 빠르게 포착한 대상의 핵심, 거침없는 붓질로 그려나간 이미지, 단순화한 형태와 그만큼 대담한 색상의 구획이 이룬 매력적인 그림이다. 바로 그런 그림에서 이 작가만의 소박하지만 의외의 기이한 힘이 있다. 몇몇 작품에서 발하는 그 힘이 작가의 추후 작품을 기대하게 만든다.
Gimdaemyeong - imaging of natural and sexual 性
Scientists (Kyonggi University professor, art critic)
All figures are expressed in the end self-interest. Interesting that they do not have a grill gutaeyeo Is there a reason? What are the regulations is a matter of art or picture gets a specific target, dealing with the subject believes it could be said that green? Thus, a tendency or trend or fashion that green can we do? So the picture is drawn, if it is false, or at the end of life is none other than hypocritical. Pictures from around the way you think / work is said to have many things without reason, from his self-made towed out of the case in practice often sees. Good writers and interesting picture, image Tues wish to self-interest. It chose the way of art is the artist's life. The figure comes from his life all that technology is to ?述. Through the act of painting is done with the technology. Of course, the technology to bypass the metaphor, imagination and illusion are swathed himself in the investigation of altitude. And he stretched out of the picture, yet poignant monologue is pretty. Between your conscious and unconscious strata of artists all over the screen, possible radiation. Customary released from compulsory self-existing language of the monologue and dialect in the same picture is a picture of this force.
그림을 통상적인 과정을 통해 학습하지 않은 작가들의 작품은 항상 나에게 극대의 기대감을 가져다 준다. 그들의 작품은 인간이 그의 신비한 영장 속에 가지고 있던 것을 고스란히 내놓은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김대명의 작품은 그 중에서도 선명한 감동을 전하고 있다.
김대명이라는 한 사람이 있다. 그는 세상 속에서 살아가지만 그의 행보는 그 누구의 행보 보다 쉽게 눈에 뜨인다. 미디어에 노출되어도 눈에 뜨이지 않는 사람들이 대부분인가 하면 김대명은 그의 삶이 그를 가장 주목 받는 인물로 만들고 있다. 그의 움직임이 또렷이 느껴진다. 그의 작품을 얼핏 보았을 때 선정적이라고 보았는가? 다시 집중하여 바라보라. 그의 작품이 이야기하고 있는 메시지는 오히려 순직함이다. 바즈 루어만(Baz Luhrmann) 감독 영화 물랑루즈(Moulin Rouge)가 슬픈 사랑이야기를 화려한 그래픽으로 표현함으로 그 슬픔을 상대적으로 더하고, 극도의 현란함으로 젊은 남녀의 사랑의 지극한 순수함이 표현되었던 것 같이 김대명의 작품도 그림의 대상이 붉고 푸른 강렬한 색채로 이루어진 여인일지라도 그의 손으로 창조한 여인은 인간의 여타의 호기심, 즉, 지적 호기심이나 발명에 대한 호기심과 같은 것이다.
그 호기심의 순간에 김대명의 정신은 그 누구보다 집중되었음을 그의 작품은 명확히 증명하고 있다. 김대명은 순직한 눈동자로 호기심에 가득 차 세상을 해석하고 있는 것이다. 그의 작품 속에 나타난 클로스 업(close-up) 구도, 순수하게 형태를 중심으로 한 세부묘사, 가까이 보면 볼수록 단순화 되어 하나의 기하학적 형태로 보이는 그의 여성에 대한 묘사가 그의 작품들은 개인적인 감정의 이입 보다는 미술이라는 시각학문에 대한 관심이 그의 어떠한 다른 관심들 보다 앞서 있는 것을 증명한다.
김대명이 사용하는 컬러는 붉은색, 푸른색, 초록색, 흑색, 흰색을 주로 하는 원색들로 구성되어 있다. 특이한 것은 그와 같은 컬러들의 조합은 이 중 한 두 가지만 단순하고 큼직하게 섞여 있으면 그 세련됨이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그의 작품들을 모아 놓고 일관된 그의 컬러톤들을 전체적으로 바라보면 오히려 또 하나의 커다란 작품이 만들어지며 그 속의 컬러 컴비내이션(combination)은 세련됨을 발산한다. 한 작품 안에서 한 색채와 흑색 정도의 투 톤으로(two tone)으로 표현하거나, 스크린의 3원색인 RGB(Red, Green, Blue) 때문에 같은 적, 청, 녹이라는 디지털 시대에는 그야말로 그 어떤 색보다도 직설적으로 느껴지는, 상식 선에서의 세련된 美는 느껴지지 않는 과감한 컬러의 사용 역시 그의 순직한 호기심을 보여주고 있는데 그것은 그가 느끼는 감정에 대해 그는 확고한 그 만의 사상이 있고 그것이 그대로 원색이라는 직설적인 방법으로 표현되었기 때문이다.
그의 컬러 선택은 관객에게 다시금 질문하게 하는 것이다. 당신이 생각하는 세련된 美를 풍기는 색상이 진정 당신 ‘스스로’가 생각하는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는가 하고. 보면 볼수록 새로운 메시지를 전달하여 신비롭기까지 하다. 한편 그의 원색적인 컬러는 그의 세상을 향한 욕구를 보여주고 있다. 그가 바라보는 세상은 그에게는 너무 좁은 세상이다. ‘다른 사람들의 생각이 나의 생각보다 우선되어 나의 존재는 드러날 틈이 없다, 화폭 외에는.’라고 말하고 있는 듯 하다. 김대명은 이 세상이 사실은 개념적으로도 더 넓고, 더 자유로우며, 더 인간에 대한 존중이 넘치는 곳이라고, 그래서 인간은 실상 더 적극적이고 더 확고한 자신만의 신념 속에서 살아갈 수 있다고 외치고 있는 것이다. 남들과 비슷하게 살아야 잘 살아가는 것 같이 느껴지는 아슬아슬한 공중을 걸어가는 듯한 이 사회 통념에, 개별 작품 만으로 한번에는 드러나지 않고 작품들을 모아 그의 세계를 바라볼 때 드러나는 깊은 세련됨의 美가 세상은 좁은 시야로 볼 것이 아니라 넓은 시야로 보아야 한다고, 김대명 나의 작품은 그런 좁은 시야로 보아서는 이해되지 않고 넓은 시야에서만이 이해될 수 있을 것이라는 흥미로운 도전장을 내밀고 있다. 그의 시각으로 바라보는 세상은 분명 통상적인 세상에 대한 해석과 매우 다를 것이다. 그 기대감, 그것이 사람들이 예술에 대해 기대하는 바로 그것, 독창성이라는 것이다.
글의 초반부에서 김대명의 행보는 이 세상 그 누구의 행보보다 또렷이 나타난다고 하였다. 그것은 그가 그의 작품을 인위적인 방법으로 도드라지게 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의 작품 자체는 ?시각학문적 차원에서 볼 때- 매우 단순한 표현방법들을 사용하고 있다. 붉은 색이나 파란색 모두 원색에 가깝기 때문에 톤에 대한 연구나 텍스추어에 대한 연구조차도 없다. 물감의 색 그대로를 펴 바른 격의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작품이 그야말로 독창적인 것은 그의 사고 자체가 차별화 되는데 그것이 기본적인 시각학문의 원리들을 통해 에센스들만의 작용으로 그의 메시지가 명확히 전달되고 있다는 것은 전문적인 미술 수학기간이 거의 없다고 할 수 있는 작가에게서 발견되는 것 자체가 놀라울 뿐이다.
줄여 말하면, 시각학문이란 작가가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시각언어를 통해 명확하고 효과적으로 전달하는 것이라고 단순화 하여 이야기 할 수 있는데 메시지라는 것과 이를 표현하는 시각언어 방법이 정확하게 서로 상응하기가 사실 쉽지 않은 과정인데 김대명의 작품은 게다가 단순성을 가지고 두 가지를 절대적으로 상응시키고 있으니 놀라지 않을 수 없다. 그가 적은 글에서도 인생에 있어서 중요한 것이란 무엇인가를 논하고 있는데, 그의 중심 에센스를 포착하는 능력은 그의 작품에서도 놀라울 정도로 표현되었다.
나는 노련한 작가의 붓을 휘감듯 그려진 그림보다 자신의 주관이 뚜렷한 조금 덜 노련한 작가의 작품이 훨씬 더 매력적으로 다가올 수 있고 더 존중 받을 수 있다는 것을 믿는다. 그것은 창의력을 바삐 논하는 현대사회에서 어린아이들의 작품을 보고 창의력에 대한 연구를 하고 논쟁을 펼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만큼 인간이 가지고 태어난 개개인의 독창성은 위대한 것이며 김대명은 그것을 보유하고 있는 것이다. 너무 많은 사람들이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있던, 그야말로 선물로 주어진 위대한 자신만의 고유성을 잃어버렸다. 고유성 보다는 다른 사람들과 비슷하게, 혹은 다른 사람들의 기준에서 좋은 것을 따라가다 보면 그것을 잃어버리는 것은 소리 없고 언제 없어졌는가 하지만 그것이 메마르고 내가 따랐기 때문에 믿었던 세상도 등을 돌릴 때, 그 때의 공허함은 경험하지 않아도 되는 것을 경험하는 불필요한 어두움이다.
김대명의 어수룩하지만 이것이 ‘나’라는, 이 순간은 ‘나’의 순간이라는 이 세상 그 무엇도 어찌할 수 없는 그 에너지를 나는 김대명의 작품을 통해 느낄 수 있다. 본질적인 인생에 대한 한 인간의 철학, 인간의 고유성으로 짙게 무장한 그 철학과 세상에 대한 끊임 없는 호기심과 질문, 그리고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한 고민의 과정의 시간들과 찾아 놓은 해답들이 그의 작품을 가득 채우고 있는 것이다. 인생에 대해 감사한 마음도 없이 그냥, 그저 그렇게 살아가는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김대명은 원색적이고, 가까이 볼 때 통상적인 세련됨은 잘 보이지 않는다 할지라도 통상이라는 그 지겨운 벽보다 높은 가치에 대해 논하고 있는 것이다.
그야말로 그의 메시지가 이해되고 되지 않고는 김대명의 몫이 아니라 세상의 몫이다. 김대명이 관객에게 던지는 질문들, 그가 그려낸 그의 인생의 행보가 이와 같다면 당신의 행보는 어떠하였는가를 그가 던져 물을 때, 그리고 그 질문을 받은 관객이 나였다면 나는 무엇이라고 대답하였을까? 싸구려에 불과한 돈이라는 것을 주고 산 것이 아닌 선물로 받은 나의 육체, 나의 시간, 나의 삶이라는 것에 대해, 나는 얼마나 소중하게 그 고유한 선물을 간직하고 일구어 왔는가? 김대명처럼 적극적인 태도로 호기심이라는 것을 통해 앞에 펼쳐진 것을 바라보기보다는 왜 더 이상의 기회는 내게 주어지지 않는가 하며 주어진 보배를 보지도 못하고 어리석게 불평하며 시간을 낭비하지 않았는가? 새해를 맞이하며 김대명의 작품이 나의 인생을 되돌아 보게 한다. 김대명의 글에서 그가 말했다. “도봉산에 매료되어 산을 그려야겠다는 꿈틀거림을 시작으로 붓을 잡게 된 계기 유발”. 30대 적지 않은 나이에 자신이 원하는 분야에 투신한 경위만을 보아도 그의 자신의 고유성에 대한 충실도가 얼마나 높은지를 알 수 있다.
나는 작품의 한 작은 일부도 여느 완성된 작품 전체보다도 작가에 대한 아티스트로서의 확증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즉, 심지어는 미완성 같이 보일 지라도 인간이 인간의 본성을 드러내며 그은 붓 자국은 숙련된 붓 자국과는 또 다른, 하지만 동일한 수준의 예술성과 만물의 영장, 우주를 이루는 한 개체로서의 인간의 신비한 면모가 나오는 이 세상 어떤 것과도 비교될 수 없는 가치의 순간이 있음을 보아왔다. 그것은 그 작가 한 사람의 것도 아니다. 태어날 때부터 주어지며 태어났고, 우주의 흐름과 맞물린 순간에 그려진 것으로 현대 디지털 작품들과 비교하여 생각할 때 오직 사람 손으로 그려진 예술 작품에서만 발견될 수 있는 것이 그것이다. 그것이 발견되는 순간들을 나는 마치 하늘에서 유성이 떨어지는 순간, 혹은 산에서는 천연기념물을 발견하는 순간과 같이 생각하는데 그 보물이 김대명의 작품 속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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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택교수의 미술평론이 모르는 이를 위해서도 잘 적었다. 그림을 보는 눈에 도움이 될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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