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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는 취미 아닌 삶의 영양소”

흔적. 2009. 3. 31. 11:08

이석연 법제처장 ---

 

“책은 절대 취미가 아닙니다. ‘인생의 과정’으로, 죽을 때까지 인간의 피와 살을 만드는 양식과 같은 ‘삶의 영양소’입니다.”

지난 26일 서울 종로구 세종로 정부 중앙청사 집무실에서 만난 이석연(55) 법제처장은 법조계에서도 유명한 ‘지식 노매드(유목민)’다. 동서양 고전문학에서부터 철학, 역사, 과학까지 섭렵한다.

지금도 1주일에 3권은 거뜬히 읽어낸다. 목차를 보고 주요 부분만 발췌해 읽는 책까지 따지면 1주일 독서량은 7, 8권. 매일 오후 10시부터 오전 1시까지는 이 처장만의 ‘독서시간’이다. 그래서인지 집무실 책상에도 고전에서부터 최근 베스트셀러까지 분야를 넘나드는 서적들이 놓여 있었다. 내공이 쌓이지 않고서는 나올 수 없는 독서 식성이다. 역시 책과의 인연은 질기고도 깊었다. 1971년 전북 김제시 금산면 금산사가 출발점이었다.

“중학교를 졸업한 뒤 6개월만에 대입 검정고시에 합격했습니다. 이대로 대학에 진학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에 책을 싸들고 금산사에서 1년8개월을 보냈습니다. 그때 서양 고전문학과 철학 서적을 300권 읽었는데, 그게 지금까지도 많은 도움이 됐어요.”

고독한 산사에서 쌓은 ‘지력’ 덕분일까. 1971년 대입 검정고시에 전북 수석으로 합격했던 이 처장은 전북대 법학과를 졸업한 지 얼마 안된 1979년 행정고시에 합격했다. 법제처에 근무하다 2년여 군복무를 한 뒤인 1985년에는 사법고시도 통과, 변호사로 활동했다. 이 처장은 “금산사에 머물면서 고향인 정읍뿐 아니라 전주 도서관까지 찾아가서 책을 어렵게 빌려 읽었다”면서 “이해가 안 되도 읽고 또 읽었는데, 그게 고시를 볼 때 큰 도움이 됐다”고 말했다.

그는 당시 감명깊게 읽었던 독일 문호 괴테의 ‘파우스트’ 구절을 지금도 암기하고 있다. 이날도 ‘인간은 노력하는 한 방황한다(Es irrt der Mensch, solange er strebt)’는 명문을 원어로 그대로 읊었다. 이 처장의 노트에도 책에서 읽다가 발견한 명문이 빼곡히 적혀 있었다. 그야말로 ‘메모의 습관’이 몸에 밴 셈이다.

“책을 끝까지 읽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을 가져서는 안 돼요. 군더더기는 과감히 건너뛰고, 중요한 부분은 밑줄을 그으면서 적극적으로 읽어야 합니다. 좋은 문장은 당연히 노트에 적어야 기억에 남습니다. 그게 강연이나 아이디어가 필요할 때 요긴하게 쓰입니다. 저는 1966년 초등학교때 쓴 일기장도 아직 가지고 있습니다.”

인생에 영향을 미친 책을 묻자 이 처장은 “단 한권의 책이 영향을 미칠 수는 없고, 한권한권이 다 중요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요즘도 시간날 때마다 꺼내드는 책이 있기는 하다. ‘파우스트’와 호머의 ‘일리아드’, 조지훈의 ‘지조론’, 그리고 ‘손자병법’. 이 처장이 꺼내들고 온 ‘손자병법’은 30년 전 박영사에서 출판한 세로쓰기로 된 문고판으로, 누런 세월의 때가 고스란히 묻어 있었다. 그는 “대학때 처음 읽고, 군대에서도 즐겨 읽었으며, 지금도 가끔 꺼내든다”고 말했다.

1만여권이 넘는 이 처장의 서가를 차지하고 있는 것은 인문교양서적. 젊은 시절부터 직업인 법률 관련 서적보다는 교양서를 즐겼다. 부인이 “왜 교양서만 잔뜩 사오냐”고 의아해했다고 한다. 요즘들어 과학서적이 자꾸 눈에 들어온다고 했다. 사시 합격으로 공직을 떠난 지 24년만에 법제처로 다시 돌아온 이 처장이 가장 우려하는 점은 이른바 ‘사’자 들어가는 지식인뿐 아니라, 공직자들도 책을 안 읽는 세태다. 소장도서 6000권을 모교인 도서관에 기증한 것도 같은 이유다. ‘책 읽는 공직사회’ 캠페인을 벌일 생각도 가지고 있다.

“책에서 얻은 교훈은 실생활에서 써야 힘이 되는데, 너무 책을 안 읽으니까 모험, 도전정신, 창의성이 떨어진다. ‘리더스 아 리더스(Readers are leaders)’라는 말처럼 책을 많이 읽은 사람치고 리더가 아닌 사람이 없다. 젊은이여, 책에 푹 빠져라.”

 

 신보영 2009.03.30. 문화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