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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국가기록관리의 현실

흔적. 2009. 4. 21. 13:06

한국국가기록연구원 창립심포지엄 발표문(1999년 4월 3일)

 

국가기록관리의 현실               

 

이만열(숙명여대 한국사)

 

 

 

1. 머리말
2. 기록을 남기지 않는 풍토
3. 기록 관리기관의 비체계성
4. 기록 관리기관의 권한 미비
5. 기록관리의 전문성 미비
6. 보존연한규정의 불합리성과 무차별 폐기 관행의 만연
7. 보존기록물의 양적질적 빈곤
8. 맺음말

 

 

 

1. 머리말
 
  1994년 초 `1212 구테타적 사건'이 문제가 되었을 때 신문 한쪽 귀퉁이에 실린 자그마한 보도가 당시 식자들을 놀라게 했던 것을 기억한다. 근대 국가라는 우리 나라에서도 이러한 일이 있을 수 있을까 하는 충격이었다. 그것은 `1212 구테타적 사건'과 관련된 `매우 중요한' 기록이 소각파기되었다는 것이었다. 신군부의 `1212 사건'의 사법상 여부를 따지는, 당시 육군 참모총장 정승화씨에 대한 대통령의 체포 재가서가 기록보존연한 3년에 해당하는 계엄관련기록으로 분류되었기 때문에 파기되었다는 것이다.


  당시 우리는 그 기록이 3년밖에 보존하지 않아도 될 만큼 단순한 계엄관련기록인지에 관해서 깊은 의혹을 가졌을 뿐만 아니라, 가령 기록의 내용상 그렇게 밖에는 분류할 수 없다고 하더라도 한 시대의 역사의 흐름을 바꾸어 놓은 그런 중대한 <국가적인 문서>를 정부의 한 부처의 시행조례에 의해 함부로 파기해도 괜찮은지에 대해 도무지 납득이 가지 않았다. 이것은 조선조의 사초 관리 등 국가의 문서 보관의 역사적인 실례를 빌어오지 않더라도 상식에 크게 어긋나는 `짓'이었다.


  이런 문제는 거기에 그치지 않는다. `1212' 이후 집권한 군부가 그들의 전횡을 위해 급조했던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라는 기구가 막강한 힘을 발휘하였는데, 최근 들리는 바에 의하면, 거기에 관한 기록도 없다고 한다. 파기되었는지, 엉뚱한 곳에 보관되고 있는지 모르지만 확실한 것은 그 서류들이 정부의 통제에서 벗어났다는 것이다.


  위에서 든 예는 권위주의 시대, 군부가 집권하던 시대라서 그렇다 치자. 신군부 통치의 어두운 터널을 벗어나 문민정부가 들어섰으면, 문민정부답게 국가의 문서관리에서부터 변화와 개선이 오기를 기대하는 것은 지나친 욕심이라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문서관리에 관한 한 군부시절이나 문민정부 시절이나 별로 나아진 것이 없었다. 그 단적인 예로, 지난 번 환란()을 초래한 원인을 규명하기 위한 국회 청문회가 열렸을 때, 국가의 외환위기를 불러온 원인을 문서로써 확인하기가 어려웠던 점을 지적할 수 있다. 이유의 하나는 환란을 초래한 시기의 국가경제정책을 통할하던 지휘부가 기록을 제대로 남겨놓지 않았기 때문이다. 정부의 경제총수였던 재정경제원 장관의 경질에 따른 인수인계가 서면으로 제대로 되지 않아 그 뒤 환란규명에 혼선을 빚고 있었던 것도 그 한 예라 할 것이다. 여기서 지금까지 역대 정권은 군사정권이든 문민정권이든 문서의 생산 관리 등에 관한 한 별로 다를 것이 없다는 인상을 받는다.


  이와 같이 국가기록의 관리가 한 시대의 역사를 바로 증언하는 데에 필요불가결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공적 기록에 대한 우리 정부의 관리 실태는 불안하기 짝이 없다. 우선 정부기관으로서 공적 기록의 관리를 책임지고 있는 정부기록보존소가 단지 행정자치부의 최하위 소속기관(2급 기관장)에 불과할 뿐만 아니라 몇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행정공무원들이 잠시 쉬어가는 일종의 `휴식소'와 같은 곳이었다고 하니 기록의 관리가 철저하게 이루어질 턱이 없었다. 뿐만 아니라 대통령 비서실을 비롯하여 대부분의 공공기관들이 기록을 `생산하지 않고 관리하지 않으며 공개하지 않는' 기막힌 `원칙'을 관행이라는 이름으로 따르고 있다는 사실은 우리의 기록 관리의 현주소를 여실히 말해주고 있다.


  다행히 `공공기관의 기록물관리에 관한 법률'(이하 기록관리법으로 줄임)이 작년 12월 28일 국회를 통과하여 금년 1월 18일에 공포되었고 2000년 1월 1일부터 시행된다고 한다. 어쩌면 우리의 기록관리의 현주소에는 걸맞지 않는 너무 좋은 법률이 제정되어버린 것인지도 모른다. 정부기록보존소를 비롯한 일부의 `과도한' 노력에 의해 기록관리법이 제정된 것은 우리 모두가 축하해 마지않을 일이지만, 필자는 이 법률을 사문화시켜 버릴지도 모르는 기록관리의 참담한 현실을 걱정하지 않을 수 없다.


  이른바 힘 있는 기관이 기록 관리에 대해 관심을 갖지 않는다면, 그리고 국민들조차도 이 심각한 문제에 대해 자각하지 않는다면, 그 동안의 불행한 경험으로 보아 기록관리법이 사문화되는 것은 일도 아닐 것이다. 기록관리법을 사문화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 이 글이 우리 모두로 하여금 기록관리의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게 하고, 현실을 극복하는 데에 지혜를 모을 수 있게 하기를 기대해 본다.

 

2. 기록을 남기지 않는 풍토
 
  기록 관리의 현주소는 먼저 기록물 생산의 측면에서 단적으로 드러난다. 모든 국정 행위가 기록으로 남겨지고 이의 체계적인 관리를 통하여 행정의 투명성과 효율성이 보장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현실은 `생산하지 않고 관리하지 않으며 공개하지 않는' 풍토가 일반화되어 있다.


  정책의 시행에 관련된 실무회의는 물론이고 정책결정에 직접적 영향을 미치는 각종 회의조차 회의록을 남기지 않고 있다. 예컨대 국정 최고회의인 국무회의의 경우도 안건별로 보고서철이 남겨져 있을 뿐 국무위원의 발언을 포함한 회의록은 작성되지 않는다. 기타 각 부처의 실국장 회의나 중요 사업에 관련된 기록 역시 충실히 생산 관리되지 않고 있다. 이렇게 정확한 기록을 남기지 않고 보니, 정부는 국정 전반에 대한 국민의 신뢰를 얻어내는 데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앞서 잠시 언급하였듯이, 사건사고에 대한 청문회 때마다 충분한 증거자료가 제시되지 못하였던 것도 근본적으로는 기록 관리체제의 헛점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국정의 최고 책임자인 대통령 관련기록의 경우에도 재가문서를 제외하고는 거의 남아 있지 않다. 대통령 자신의 일기류는 물론 하찮은 메모까지 관리하고 있는 선진국의 사례를 들지 않더라도 대통령 관련 기록의 체계적 관리는 국민 모두의 관심사가 아닐 수 없다. 우리 같이 그의 일거수 일투족이 국민생활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는 현실에서 본다면, 공사()를 불문하고 그에게 제공되거나 그가 제공한 문서는 보관되어야 한다. 가능하다면 접촉한 인사들과의 면담록도 녹취되거나 기록으로 남겨져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대통령 관련 기록들은 사적 기록은 물론 공식 기록 조차도 없어지거나 사용화()되고 있는 실정이다. 대통령 주변 인물에 의해 역대 대통령의 역사가 신문 지상을 통해 국민에게 알려지고 있는 상황은 기록문화의 저급성을 단적으로 드러내 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앞서 소개한 기록관리법에서도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기록의 생산강제 조항을 두고 있다. 아마도 시행령의 수준까지 가면, 회의록 생산 강제라든지 고위 공직자의 면담록 생산 강제, 그리고 대규모 사업의 입안과정결과에 관한 기록 생산의 강제에 이르는 여러 조항들이 만들어질 것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몇십년 동안 길들어온 기록 경시의 악습이 법률의 제정만으로 없어질 수 있을 지 걱정이 앞선다.


  정부 수립 이후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는 기록 경시의 풍조는, 국민을 위하여, 그리고 행정담당자를 위하여, 나아가 우리 후손을 위하여 기록을 남겨야 한다는 의식 자체를 앗아가버렸다. 기록 관리의 가장 근본적인 문제는 그 누구도 자신의 행위를 기록으로 남기려는 적극적인 자세를 갖고 있지 않다는 데에 있다. 거기에는 기록을 남겨 화근이 된 저간의 역사적인 사례들도 한 몫을 했을 것이라고 추정해 본다.

 

3. 기록 관리기관의 비체계성
  
   기록을 잘 남기지 않으려는 이같은 후진적 상황은 단지 풍토의 탓 만으로 귀결시킬 수는 없다. 기록 관리의 후진성은 관리기관의 측면에서도 발견된다. 아래의 표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종래 우리나라의 기록관리기관은 부처별 필요에 의해 분산적이고 비체계적인 형태로 설치되어 있다. 기록관리의 업무를 총괄적으로 감독하고 통제할 장치가 없는 현실은 대단히 심각한 문제라 아니할 수 없다. 현재 정부기록보존소, 외교부 외교사료과, 국사편찬위원회, 국방부, 국회사무처, 법원행정처 등에서 일단 열악하나마 기록관리에 노력하고는 있지만 총괄기관의 부재 상황에서는 그 실효를 기대하기 어려운 실정이다.

 

 구분               기    관                 보존기록물                                     근거법령

행정부       정부기록보존소         행정부 기록물 일반           <사무관리규정>

                                                                                   <사무관리규정시행세칙>

                                                                                   <공문서분류및보존에관한규칙>

                외교통상부              외교관계문서                   <외교문서보존및공개에관한규칙>
                외교사료과

              국사편찬위원회   고문서 및 사료적 가치가 있는     <사료의수집및보존에관한법률>

                                                각종 공문서 

                국 방 부                   국방부 문서                      <군사기밀보호법>

               국가정보원               국가정보원 문서                 <국가정보자료관리규정>

입법부      국회사문처           국회행정문서, 의안, 회의록     <국회공문서내규>

사법부      법    원                  법원행정문서, 판결문,           <법원보존문서관리규칙>

                                               민사판결정본

 

                                 <국가기록의 관리기관과 근거 법령>

 

 

  또한 지방자치기구의 경우는 기록관리기관 자체가 구성되어 있지 않은 경우가 대부분이다. 현재로는 국가기록을 행정자치부 정부기록보존소로 이관하여 관리하고 있지만 이는 효율적이지도 않으며 지방자치를 지향하는 시대적 요구에도 걸맞지 않다.


  더욱 커다란 문제는 실제로 기록을 생산하는 부처 단위에 기록관리를 전문적으로 수행할 수 있는 부서가 없다는 것이다. 대체로 각 부처 총무과 내의 문서담당자 정도의 수준에서 기록을 관리하고 있으나 현재로는 생산되는 기록의 단순 등록, 서고 배치 등의 수준에 머무르고 있는 실정이다. 더구나 문서관리담당자들은 최하위 기능직 공무원들이 배치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며 이들은 공문서를 캐비넷에 가지런히 꼽아두는 단순하고도 기계적인 일로 기록 관리를 생각하고 있다.


  기록을 생산하는 말단 단위기관에서 기록 관리를 총괄하는 기관에 이르기까지 전혀 체계가 잡혀있지 않는 상황에서 정상적인 기록관리를 기대하는 것은 무리이다. 이러한 문제를 고려하여 기록관리법에서는 기관정비를 위한 조항들을 두고 있다. 중앙기록물관리기관, 지방기록물관리기관, 자료관에 관한 조항들이 그것인데, 각급 생산기관에 자료관을 두고 자료관을 통해 관리되는 기록물들을 중앙 및 지방의 전문관리기관에서 총괄적으로 보존관리한다는 구상이 법률 내용 속에 잘 담겨 있다. 그러나 머리말에서 지적하였듯이 우리의 기록관리의 현실은 법률에서 제시한 관리기관의 체계를 현실화시키는 데에 오히려 커다란 장애로 작용할 정도의 수준에 머물러 있다. 예전대로라면 법률 근거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료관이나 전문보존기관을 설치해야할 각 기관에서는 복지부동으로 일관할 것이다. 법률이 공포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지방기록관리기관을 설립하기 위한 조례제정작업에 들어간 광역지방자치단체가 아직 없다는 사실이 이를 잘 말해준다. 각 기관에서 법률에 근거하여 적극적으로 기관 설립에 나선다고 하더라도 인사주무기관이나 예산주무기관에서 여러가지 이유를 들어 이에 반대할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다. 결국 법률이 제정공포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자료관이나 전문관리기관을 설립토록 정부기관에 압력을 행사하여야 하는 현실에 우리는 살고 있는 것이다. 이 점은 일면 기록관리를 맡은 기관의 권한 미비와 관련되는 문제라고 할 것이다.

 

4. 기록 관리기관의 권한 미비
  
  기록 관리기관은 그 권한의 측면에서도 대단히 취약한 실정에 있다. 기록 관리기관은 각급기관에 대해 기록의 생산과 이관을 강제할 수 있는 권한을 보유하고 있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국회 사무처나 법원 행정처, 외교부 외교사료과와 같이 부처 내의 한 부서에 지나지 않으며, 기록관리를 위한 권한을 행사하며 적극적으로 업무를 수행할 수 있는 위치에 있지 않다. 행정 각 부처의 기록을 총괄적으로 관리하고 있는 행정자치부 정부기록보존소의 경우도 2급 기관장에 의해 운영되는 하위기관에 불과한 실정에 있다.


  기록 관리기관의 권한 미비는 체계적인 기록 관리를 가로막는 최대의 장애로 작용하고 있다. 예컨대 준()영구영구로 분류된 기록은 모두 정부기록보존소로 이관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1997년 현재 580여만권의 기록이 이관되지 않은채 각 부처 내의 항온항습도 되지않는 서고에 쌓아놓고 있다. 정부기록보존소가 현재 보유하고 있는 행정부 기록이 약 38만권인 점을 고려하면 무려 93.5%의 기록이 규정 위반의 상태에서 각급 기관 문서고에 방치되고 있는 현실인 것이다. 기록관리기관의 권한 미비가 낳은 문제점을 단적으로 드러내주는 사례라고 하겠다. 이런 마당에 기록관리기관이 일선 행정기관의 기록 관리상태에 대해 지도점검이나 시정조치를 행한다는 것은 현실적으로는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기록관리법에서도 이 부분에 대해서는 그다지 커다란 진전을 보이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중앙 및 지방기록물관리기관의 기능에 지도점검 등을 적극적으로 넣고는 있지만 우리나라 현실에서 이러한 기능을 실제로 행하기 위해 필수적으로 필요한 기관의 권한 강화 부분은 명시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법률제정을 추진한 행정자치부 정부기록보존소의 현 위치에서 이러한 문제를 적극적으로 표현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겠지만 적어도 중앙기록관리기관의 위상을 차관급으로 격상시켜야 하는 일은 기록관리의 현실 문제를 타개해 가는 데에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고 생각된다.


5. 기록관리의 전문성 미비
 
  기록관리의 정상화는 전문인력의 배치가 전제되지 않는 한 이루어질 수 없는 과제이다. 기록관리기관의 내부 운영실태를 보아도 기록물 관리의 낙후한 현실은 여지 없이 드러난다. 예컨대 정부기록보존소의 인력구조를 보면 박사급 전문인력이 67명에 지나지 않으며 학예직사서직 일부를 제외하고는 모두 일반 행정직이나 기능직 인력이 그 구성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그것도 최근 정부기록보존소가 인력구조 개혁작업의 일환으로 작년에 학예연구관과 연구사를 10여명 영입한 결과라는 점을 생각하면 그동안은 거의 전문인력 없는 기록관리기관이었음을 알 수 있다. 미국의 국립기록관리청에 석박사 전문인력 1,200여명이 근무하고 있는 것이나 독일의 연방기록보존소에 박사급 전문인력만 하더라도 100여명 이상, 그리고 프랑스에서 석사급 이상의 문서관리관 450명이 포진하고 있는 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낙후한 실정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 이러한 인력구조가 기록관리의 전문성 미비로 이어지며 전문성의 미비가 곧 기록관리체제의 비체계성비효율성을 낳는 주요 원인이 됨은 말할 나위도 없다.


  각급 기관에서 기록을 관리하고 있는 인력 역시 전문성을 띠지 못하고 있다. 대체로 문서관리담당자로 불리우는 각급 기관의 기록 관리자는 서무를 담당하는 일반 행정직이나 기능직이 겸하고 있으며 그나마 잦은 인사이동으로 인하여 전문성은 고사하고 업무자체의 연속성조차 꾀하기 힘든 실정에 있다. 비전문적인 이들에 의해 국가기록이 마구잡이로 폐기사장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해결하기 위한 근본적인 조치가 마련되지 않고 있다. 정부기록보존소에서 문서관리담당자들에 대한 실무교육을 실시하여 문제 해결에 접근하려 하고는 있으나, 각급 기관에 전문인력을 고정배치하는 등의 근본적 해결책을 강구하지 않는 한 기록관리의 전문성은 확보될 수 없을 것이다.


   기록관리법에서 기록관리전문요원에 대한 규정을 마련하여 기록관리의 전문성을 제고하는 계기를 마련한 것은 다행한 일이라 아니할 수 없다. 그러나 이 부분 역시 국가자격증제도 등을 통해 보완되지 않는 이상 현실적으로는 많은 한계를 남길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외국의 경우 이미 아키비스트 자격증제도를 도입하고 있다는 점을 고려할 때 이 역시 우리의 기록 관리 현실의 낙후성을 말해주는 중요한 대목이라 하겠다. 사실 기록관리법이 제정공포되어도 관심조차 보이지 않는 행정현실에서 국가자격증을 두도록 정부에 요구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기록관리의 정상화를 위한 과제 가운데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이 바로 전문인력의 양성과 배치라는 점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국가기록연구원과 명지대학교에서 공동으로 추진하고 있는 한국기록관리학교육원 설립 움직임은 이러한 의미에서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어두운 기록관리의 현실에도 불구하고 기록관리학교육원의 설립은 기록관리법의 공포와 함께 밝은 미래를 기대하게 하는 부분이라 생각된다.

 

6. 보존연한규정의 불합리성과 무차별 폐기 관행의 만연
 
  보존폐기 여부를 기록물 종류별로 규정하고 있는 현행 <공문서보존에관한규칙>의 <공문서분류번호및보존기간표>(이하 <보존기간표>로 줄임) 역시 문제점 투성이인 채 방치되고 있다. <보존기간표>는 현재 행정자치부 행정능률국(과거 총무처 능률국)에서 제정공포하여 사용되고 있는데 규정이 모호하거나 보존기간이 적절히 설정되지 못한 경우를 다수 포함하고 있다.


  기록관리의 전문기관이 아닌 행정능률국에서 이 업무를 관장하고 있음으로 인하여 실제로 이 <보존기간표>는 각급 기관으로부터 올라온 의견을 단지 편집하는 수준에서 작성되고 있으며, 따라서 기관별 불균형 현상이 나타나거나 보존기간이 부적절하게 책정된 경우에도 이를 근본적으로 수정보완할 수 없는 조건 하에 놓여져 있는 상태이다. 각급 기관에서는 이 <보존기간표>에 입각하여 생산된 기록의 이관폐기를 결정하고 있기 때문에 이 표의 문제점은 곧 정상적인 기록관리를 가로막는 근원으로 작용하고 있다.


  예컨대, 다음에 예시한, 계엄관련기록에 대한 <보존기간표>의 규정을 보면 영구보존대상 기록은 계엄발령원본 밖에 없는 것으로 되어 있다. 나머지 기록은 모두 10년이나 3년보존으로 규정되어 있으며 또한 10년과 3년을 나누는 기준 역시 계엄관련 중요사항은 10년, 경미사항은 3년이라는 식으로 규정되어 모호하기 짝이 없는 상태에 놓여져 있다. 몇년전 1212관련 공판에서 문제가 된 참모총장 체포 대통령 재가서도 결국 <보존기간표>의 부적절성으로 인하여 아무런 제재 없이 폐기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계엄 하에서 참모총장의 체포

 

                      A. 계엄관련문서 보존 규정
                         영구보존대상: 계엄관련발령원본 뿐.
                         계엄관련 중요사항: 10년 보존.
                         계엄관련 경비사항: 3년 보존.
                         12.12 당시 참모총장 체포에 관한 대통령의
                          재가서도 이 규정에 의해 폐기시킴.

                      B. 1980년대 국보위 상임위원회 관련문서
                          보존조항 없음현판과 관인대장만 보존

 

를 허가하는 문서가 `적법'한 절차를 거쳐 폐기될 수 있었다는 것은 기록관리의 현실을 상징적으로 나타내주고 있다고 하겠다. 이러한 조건 아래 각급기관에서는 국정 내용을 증빙할 중요 기록들이 지금 이 순간에도 무차별로 폐기되고 있는 것이다.


  최근 정부기록보존소에서 이 <보존기간표>에 대체할 <기록물분류표>라는 것을 제정 준비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기존의 각급기관에서 주먹구구식으로 만든 <보존기간표>를 그대로 두어서는 정상적인 기록관리가 이루어질 수 없다는 발상에서 기록관리법에 규정된 기록물 분류제도에 근거하여 조치로 생각되는데 늦은 감이 없지 않지만 대단히 중요한 작업이라 생각된다.

 

7. 보존기록물의 양적질적 빈곤
 
  위에서 언급한 기록물 보존관리체제 전반의 문제는 곧 보존기록물의 양적질적 빈곤현상으로 나타난다. 아래의 표에서 볼 수 있듯이, 행정부 기록을 총괄 보존관리하고 있는 정부기록보존소의 보존량은 외국에 비하여 빈약하기 짝이 없다. 미국은 국가 규모가 워낙 크고 독립 이후의 기록을 모두 수집하고 있으므로 논외로 한다 하더라도, 프랑스(1950년 이후 기록)독일(1945년 이후 기록)에 비교하여 우리나라의 기록물 소장량은 각각 1/22, 1/8에 지나지 않는다.


     <각국 기록보존소의 소장량 비교>

 

       국가               프랑스                           독일                        미국                 한국

소장 기록량    2,482km, 약7,000만권,     1945년 이후 연방문서만   1,850만권,          총 38만권,

                    1950년 이후 850만권          320만권 이상             대통령도서관       정부수립이후

                                                                                           3억페이지           35만권

                    

우리나라 기록물 보존기관의 보존 기록물은 양적으로 뿐만아니라 질적으로도 극히 빈곤한 상황에 있다. 마땅히 보존되어야 할 주요 역사기록들이 파기되기 일쑤인데 반해 불필요한 기록물들이 다량 중복보존되고 있는 실정이다. 예컨대, 정부기록보존소 보존기록물 38만권 가운데에는 인사발령관계, 법규관계, 징계포상관계, 기타 행정관계 등 개인의 신분재산관련 기록물들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으며, 정작 보존되어야 할 정책관련 기록물들은 극히 소량에 지나지 않는다. 앞에서도 잠간 언급하였지만, 1980년 무소불위의 권력을 행사하던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 관련 기록이 현판과 관인대장을 제외하고는 전혀 남아있지 않은 것은 보존 기록물의 질적 빈곤 상황을 잘 말해주고 있다.


  보존 기록물의 양적질적 빈곤은 우리나라 기록물 보존관리체계의 전반적 문제가 빚어낸 결과라고 아니할 수 없다. 결국 보존 기록물이 양적질적 빈곤을 면치 못하기 때문에 보존관리기관의 기록물 활용관행이 형성되지 않게 되고, 이에 따라 국민은 물론 행정기관마저 점차 보존관리기관의 존재 의미를 실감하지 못하게 되는 악순환이 계속되는 것이다. 이러한 악순환이 곧 기록을 남기지 않고 관리하지 않으며 공개하지 않는 풍토를 조성하고 기록물 보존관리체계의 낙후성을 강요하고 있음은 말할 나위도 없다.
 
8. 맺음말
 
  앞서 말한 대로, <공공기관의기록물관리에관한법률>이 제정되어 정식으로 공포되었고 2000년 1월 1일부터 시행될 예정으로 있다. 이 법률이 제정됨으로써 우리도 외국과 같이 법률에 근거하여 공공문서 생산 관리에 관한 문제해결의 가닥이 잡혀가고 있음은 정말 다행한 일이라 아니할 수 없다. 다음 발표에서 김선영 소장이 상세히 검토해주겠지만, 이 법률에는 기록물 관리 전담기관에 관한 규정, 기록물 생산 강제에 관한 조항, 표준적 관리방식에 대한 규정, 전산화에 관한 규정, 기록물 관리 전문인력에 관한 규정, 벌칙 조항 등이 포괄적으로 들어가 있다. 후발성의 이익이라고나 할까, 사실 우리 사회, 우리 정부의 기록물 관리에 대한 인식 수준에 걸맞지 않다고 느껴질 만큼, 다른 나라에 비해서도 크게 뒤지지 않다고 할 정도로 훌륭한 법률이 탄생하였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기록관리법이 제정되었다고 해서 법률체계가 완성되었다고는 볼 수 없다. 기존의 사무관리규정이나 공문서분류및보존에관한규칙, 외교문서보존및공개에관한규칙, 국가정보자료관리규정 등이 이 법률을 준거로 하여 전면 개정되거나 폐지되어야 할 터인데 정부부처의 그동안의 행태를 볼 때 쉽게 문제가 해결될 수 있을지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지방자치단체에서는 이 법률의 시행을 준비하기 위해 지방기록보존기관의 설립 및 그 운영에 관한 조례를 제정해야 하지만 실제로 조례제정을 위한 실무적 작업을 진행시키고 있는 자치단체는 아직 없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또한 법률체계의 완성은 그 법률이 제대로 시행될 때만이 현실적 의미를 지닌다. 그런대로 좋은 법률임에도 불구하고 현실적으로는 지켜지지 않는 사문화된 법률이 되어버린 경우를 우리는 그동안 얼마나 많이 보아왔던가. 기록관리법이 공포되었다고 하더라도, 이같은 관습적인 자세가 바뀌지 않는 한, 우리의 기록보존과 관련된 문화의 전망이 그렇게 밝지만은 않다는 점을 다시 한 번 강조해두고 싶다.

 

 

출처 : 목련꽃이 질때
글쓴이 : 어린왕자 원글보기
메모 : 지난 글이지만 지금도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