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기업에 대한 재평가 연구가 되고 있는 모양입니다. 과거처럼 무조건적 비판과 적대보다는 직시하여
길을 제시하는 방향이 필요하겠지요. 괜찮은 견해라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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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정적 소유권에 신속한 의사결정…/ 계열사 간 역량 공유해 시너지 효과…
이번 경제 위기는 개도국보다는 선진국을 더 강타했지만, 선진국 그룹 안에서도 의미 있는 차이가 있다.
더 시장주의적인 미국과 영국이 타격을 더 많이 받은 반면, 규제 친화적인 독일과 프랑스의 대륙 자본주의는 상대적으로 잘 버티고 있다.
같은 자본주의 시장경제를 채택한 국가 간의 이러한 격차는 이미 학계의 주요 관심사였는데, 앞으로 새롭게 더 조명을 받을 것으로 기대된다. 특히 불황기에 선전(善戰)하는 한국 대기업들에 대한 재조명이 이뤄져야 한다.
최근 한국 경제가 불행하게도 1997년과 비슷한 외환시장 위기를 겪었지만, 대기업들의 모습은 10년 전과는 천지 차이이다. 10년 전 한국의 대표 재벌들은 과잉투자로 외환위기를 몰고 온 주범의 하나로 낙인찍혔고, 동아시아 모델의 몰락과 더불어 사라질 기업 형태로 인식됐다.
그러나 동아시아 모델은 급격한 자유화와 함께 해체의 과정을 밟았는지 몰라도, 재벌은 찬란히 부활했다. 2000년대의 자료를 이용한 실증 연구에서는 일관되게 재벌계 기업의 성과가 상대적으로 더 우수하게 나온다. 더욱 재미있는 것은, 그 많은 재벌 개혁 조치를 다 받아들였음에도, 여전히 가족 지배하에 남았고, 여전히 다각화를 유지하고 있다는 면에서 본질은 변한 것이 없어 보인다는 점이다. 그런데 어떻게 성과가 좋아졌는가?
그동안 경제학에서 소위 표준적인 기업 모델이란 소유와 경영이 분리되고 전문경영인에 의해서 운영되는 영미식의 기업이었다.
그런데 사실은 전 세계 국가 수로 보면 가족 경영이나 기업집단형 기업이 지배적인 나라가 더 많다. 그럼에도, 단순히 자본주의 종주국인 영미식 기업 모델과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열등한 기업 모델로 치부되었다.
이런 시각에 대한 이론적 근거는 소위 시장 불완전설에 기초한 거래비용 경제학이다.
이 이론은 개도국처럼 시장 기구가 불완전한 곳에서는 한시적으로 기업집단이 거래비용 등 여러 면에서 우위를 가질 수 있으나, 시장 기구가 성숙되고 개방되면 그런 우위는 사라지기에 기업집단도 몰락할 것으로 보았다.
1997년의 아시아 외환위기는 이에 대한 증거로 받아들여졌다. 기업집단을 열등시한 또 하나의 이론은 재무이론에 기초한 대리인 비용 이론이다. 기업집단하의 가족 경영은 소액주주를 무시하고 독단적으로 경영하는, 기회주의적인 대리인 비용이 커서 열등한 성과를 낸다는 것이다.
실제로 이러한 이론들의 기대대로 많은 기업집단이 지난 위기 때 사라졌지만, 또한 이 순간 많은 재벌이 건재하고, 새로이 탄생하고, 또 다각화하고 있다. 시장이 개방되고 성숙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이런 사실은 앞의 서구, 아니 정확히는 영미권 중심적 이론에 대한 중요한 반증이다.
그러면 이들 이론이 놓친 것은 무엇일까. 이들은 한국의 재벌들이 안정적 소유권에 힘 입어 신속하고 과감하고 장기적인 의사 결정으로, 꾸준히 기술과 연구개발에 투자해 선진 기업에 근접하는 혁신 역량을 구축하여 왔다는 사실을 간과했다. 또한 불확실성과 급변하는 환경 속에서, 계열사 간의 역량 공유와 시너지 효과가 매우 유효한 경쟁 우위의 원천이 된다는 점을 놓쳤다.
가령, 삼성의 디스플레이 산업의 성장은 최종 조립 판매자인 삼성전자 아래, 부품과 중간재를 공급하는 삼성전기, 삼성SDI, 삼성코닝 등 4대 전자 계열사 간의 시너지 효과에 크게 힘입었다. 이 때문에 급변하는 수요 변화에도 불구하고, 중간재 수급 걱정 없이 남보다 빨리 새로운 제품을 내놓을 수 있었다. 반면에 소니는 LCD패널 공급을 삼성에 의존해야 했다. 삼성전자가 매출액이나 기업가치 면에서 소니를 앞선 것은 2000대 중반의 일이지만, 특허의 양이나 질적인 면에서의 추월은 이미 그 10년 전에 발생했다. 즉, 한국 재벌이 1990년대에 과잉 투자를 했다고 하지만, 한편에서는 역량의 축적이 이뤄지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이런 본원적 역량 구축에 게을리한 기업은 지난 위기에 다 날아갔다.
이런 상황은 앞의 두 가지 이론의 예측과 반대이다. 첫째, 급변한 시장 환경하에서 오히려 소수 분야에 특화한 기업이 몰락하고 있고, 둘째, 임직원이 회사를 말아먹는다는 이른바 대리인 비용은 최근 몇 년과 이번 위기의 여러 미국 기업 사례에서 드러났듯이 오히려 전문 경영 기업에도 만연함이 드러났다.
사업이나 기술 간의 경계가 허물어지는 기술 퓨전(융합)의 시대에 여러 분야에 다리를 걸치는 집단형 기업은 더욱 우위를 보일 수밖에 없다. 실증 연구에서도 기술적 다각화와 성과 간의 관계는 유의미한 것으로 나온다.
세계 경제 격변기에 영미식 기업 모델은 성과 면에서 도전받고 있다. 또한 망한 GM의 사장이 전용기 타고 청문회에 왔다고 욕을 먹듯이 도덕적 우위도 사라졌다. 영미식 기업 모델이 더는 세계의 표준은 아니며, 이를 정당화해 왔고 우리 개도국 학자들이 숭배했던 기존 서구 중심 이론도 더는 맞지 않는 것으로 드러났다.
한국 사회는 서구의 시각을 가지고 한국 사회의 현상들을 잔인하게 재단하는 식민지성을 탈피해야 한다. 우리 것에 대해 부족한 면과 장점을 같이 보는 균형적 시각을 가지고 후발국형 기업 이론을 정립해 다른 후발국에 전파하여야 한다. '서울 컨센서스'를 찾아야 한다면 이런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
선진국 문턱에 들어선 이제, 한국이 직면하고 있는 세계 경쟁의 양상은, 단순히 좋은 물건을 싸게 만들어 파는 단계를 넘어, 표준이나 문화와 가치를 둘러싼 경쟁으로 변하고 있다. 우리 것에 기반을 둔 표준과 가치를 창조하지 못하고선 진정한 선진국이 될 수 없다.
거래비용 경제학
각종 경제적 거래를 수행하는 데 수반되는 비용. 자금조달이나 정보 수집 등 적절한 공급·수요자를 찾는 데 드는 비용이 해당된다.
대리인비용 이론
자기 지분이 없거나 적은 경영인이 주주의 이익에 반해 자신의 사적 이익을 추구하는 행위를 말한다.
이 근 서울대교수(경제학부) 2009.09.18 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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