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을 하게 하는 글이다. 혹한의 부대에서 지냈지만 소음하고는 별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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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역 군인이던 지난 1999년 국방대학원 교육을 1년간 받았다. 그해 여름 해군은 국방대학원 교육생들에게 해군 2함대 사령부를 방문할 기회를 주었다. 일행은 함정에 승선, 해군의 작전과 함정 운용에 대한 설명을 들으며 근해를 운항했다. 이번에 천안함 침몰의 비보를 듣자마자 그때 보았던 해군 장병들의 모습이 곧바로 떠올랐다.
당시 함정이 움직이면서 함상(艦上)의 각종 장비가 소개되는 동안 배 밑 기관실에 대한 호기심이 생겼다. 군 생활 동안 크고 작은 항공기 엔진을 자주 보았지만 이런 군함의 엔진은 과연 어느 정도이고 어떻게 생겼을까, 엔진 작동 인원은 몇 명일까 궁금했다.
엔진 기관실로 내려가는 길 자체가 어른 한 사람이 다니기에도 좁고 가파른 철제 계단이었다. 계단을 내려가자 엔진 소리는 점점 커졌다. '기관실'이라고 쓰인 육중한 철문을 여는 순간, 내 눈과 귀 그리고 코가 마비되는 것 같은 충격을 받았다. 매캐한 연료 냄새와 그을음, 연속적인 피스톤 작동 소리, 그리고 마치 용광로 옆인 듯한 엄청난 열기…. 그야말로 모든 공해(公害)의 집합소가 바로 함정 기관실, 그곳이었다.
기관실 문을 열면 공해가 조금 덜 하기는 하겠지만 그 경우 함 전체에 피해를 주기 때문인지 그곳의 부사관들과 병사들은 기관실 문을 닫은 채 모두 반바지와 반팔 차림으로 뜨거운 열기를 이겨내고 있었다. 그들만 아는 서로의 눈빛과 수화(手話)로 계기를 점검하고 엔진을 작동시켰다. 때로는 엔진 소리보다 더 크게 목이 터져라 외치면서 임무를 수행했다.
내가 그때 그들의 눈동자에서 본 것은 '책임감'이었던 것 같다. 그들의 양 팔뚝에 불거져 나온 검붉은 핏줄은 적함(敵艦)을 물리치려는 의지처럼 보였다. 그들의 이마에서 흘러내리던 굵은 땀방울들은 자신감과 자긍심이었을 것이다. 그들은 아예 기관실의 그을음과 냄새, 소음, 열기에 친숙해진 모습이었다.
그때까지 공군 조종사로서 비행 임무가 힘들다고 생각했었다. 나 외에 전후방 각지에서 자기의 군생활이, 자기의 특기가 가장 힘들다고 이야기하는 것을 많이 보고 들었다. 하지만 그때 그 해군 함정의 기관실을 보고 나서는 이 사람들이야말로 그 어느 군인보다도 고생하는 분들이라고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같은 푸른 제복이지만 이렇게 열악한 환경에서 책임을 다하는 군인들도 있구나 하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혹한의 고지(高地)에서 근무하는 국군 장병들은 어떻든 맑은 공기를 마실 수 있고, 별을 볼 수 있다. 그러나 기관실의 해군들에게 맑은 공기는 꿈꿀 수 없는 것이었다. 그들은 함정 갑판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알 수도 없고, 생각할 겨를도 없이 오직 기관 작동에만 전념해야 했다. 나는 그 군인들을 보고 지하(地下) 막장의 광부들을 떠올렸다. 그날 이후 군생활이 힘들다는 장병들의 얘기를 들을 때마다 내가 본 해군 함정 기관실을 이야기해주었다. 그들을 위한 사기 진작 방안이 최우선으로 고려되어야 한다는 것이 나의 작은 소신이 됐다.
침몰 천안함의 실종자 대부분이 기관실과 함정 하부에서 근무 중이었다는 사실을 듣고 무엇이 가슴에서 복받쳐 오르는 듯했다. 그들도 칠흑 같은 어둠을 가르며 바다를 지키고 있었을 것이다. 천안함의 기관실도 엄청난 소리, 냄새, 열기로 가득 차 있었을 것이고, 그 좁은 공간에서 많은 해군이 검붉은 핏줄 위에 흐르는 굵은 땀방울을 훔치고 있었을 것이다. 그렇게 마지막까지 임무를 수행했을 것이다. 가족과 나라를 지키기 위해서. 그들을 향한 애절한 마음을 금할 수 없다. 모두 생환하기를 간절히 기원한다.
이귀형 예비역 대령·공군조종사 / 2010.03.30 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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