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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작품 그 도시] 어둠 속 '나'를 보았다, 더이상 빛을 찾지 않았을 때

흔적. 2015. 6. 14. 14:08

 

일요일 아침. 늦게 일어나 PC를 켜고 신문을 보는 순간 인터뷰 기사.

"어둠에서 어둠을 보는 방법. 난 불빛을 찾기 보담 어둠에서의 시간이 지나가길 기다린다. 그러면 어둠은 어느새 친숙해지고..." 그것을 이렇게 풀어서 적어 놓았기에 카피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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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집 '여기 아티스트가 있다'―뉴욕 맨해튼


	미국 뉴욕 맨해튼 중심가의 빌딩 사이로 석양이 지고 있다.
미국 뉴욕 맨해튼 중심가의 빌딩 사이로 석양이 지고 있다. 안희경의 인터뷰집 ‘여기 아티스트가 있다’는 예술가 8명을 인터뷰한 책이다. 이 책의 첫 번째 주인공인 행위예술가 마리나 아브라모비치는 2010년 뉴욕현대미술관에서 ‘예술가가 여기 있다’는 제목의 퍼포먼스를 선보였다. 그녀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미술관 의자에 앉아 침묵을 지키며 관객을 맞았다. 736시간 동안 850만명이 마리나를 찾았다. 백영옥은 그때 자신이 뉴욕에 있었다면 “결국 그녀가 아닌, 그녀 눈에 비친 ‘나 자신’의 어둠을 마주했을 것 같다”고 쓴다. /픽사베이

한 여자가 있다. 그녀 이름은 마리나 아브라모비치. 여기 한 남자가 있다. 그의 이름은 '울라이'라는 닉네임으로 잘 알려진 우베 라이지펜. 1970년대 유고 태생의 마리나와 독일 출신 울라이는 연인이자 동료로 10년간 함께 다양한 작품 활동을 했다. 하지만 10년 후인 1988년 각자의 길을 가기로 결정한 후, 마지막 이별 의식을 치르기로 한다. 중국 만리장성 양 끝에서 각각 출발해 중간에서 만나 마지막 포옹을 하고 헤어지기로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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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라이는 고비 사막에서, 마리나는 황해에서 걷기 시작했다. 그렇게 각자 약 2500㎞를 걸은 후 그들은 중간 지점에서 기적처럼 다시 만났다. 연인은 서로 눈을 응시한다. 그 프로젝트 이름은 'The lovers(연인들)', 그들은 이별마저 예술로 승화시킨 채 서로의 안녕을 빌며 헤어졌다.

위대한 예술가 8명을 인터뷰한 책 '여기 아티스트가 있다'를 읽었다. 그 책의 첫 번째 주인공이자 행위예술가인 마리나 아브라모비치는 그 후 활발한 작품 활동을 펼친다. 그리고 2010년, 평론가들에 의해 뉴밀레니엄을 대표하는 작품으로 선정된 '예술가가 여기 있다'를 선보이게 된다. MoMA(뉴욕현대미술관)에서 이루어진 '예술가가 여기 있다'는 미술관이 열리는 아침부터 문이 닫히는 저녁까지 마리나가 꼼짝하지 않고 의자에 앉아 자신을 찾아오는 관객과 마주 앉아 침묵으로 소통하는 기념비적 프로젝트였다. 736시간 퍼포먼스가 이어지는 동안 MoMA를 찾은 관객은 뉴욕 시민의 수보다 많은 850만명이었다.

"거기 온 사람 중에서 78명은 제 앞에 21번 이상 앉은 이들입니다…. 잊을 수 없는 한 여인과 아기가 있습니다. 아시아인인데 아기 머리를 포대기로 폭 감싸놓았더군요. 그녀가 저를 바라봤습니다. 아주 많은 고통을 느낄 수 있었어요. 아프고 아프고 아픈 고통요. 제 안에서도 깊은 슬픔이 치밀어 올라왔습니다. 그녀는 그렇게 앉아있다가 일어나기 전에 아이 머리를 덮은 포대기를 걷어 딸아이를 제게 보여줬습니다. 아기 머리에 기다란 흉터가 있었습니다…. 그녀는 병원에서 나와 그날 아침 미술관으로 온 거였어요. 그냥 제 앞에 앉으려고요. 그 어린 아기는 죽었습니다. 올해 그 아기 엄마를 제 다큐멘터리 상영장에서 만났는데요. 행복해보였습니다. 새 생명을 잉태하고 있었습니다."

그토록 오랜 시간 꼼짝하지 않고 한 번도 본 적 없는 타인을 말없이 응시한다는 건 어떤 일일까.

"저처럼 그렇게 오랜 시간 움직이지 않으면, 누구라도 아주 예민해집니다. 몸 전체로 세상을 볼 수 있게 돼요. 등 뒤에서부터 앞까지 관중을 느낍니다. 등, 손, 발 모든 곳에 눈이 달리죠. 우리가 움직이지 않을 때, 불필요한 다른 감각들은 문을 닫습니다. 정지합니다. 그곳엔 오직 현재만 있죠. 모든 것이 강하게 증폭돼요. 그런 다음 우리는 그곳에 진짜로 존재하게 되는 겁니다."

오직 그녀 앞에 앉기 위해 줄을 서고 기다린 사람들은 어떤 마음으로 그 긴 행렬에 동참했을까. MoMA 앞의 긴 줄은 미술관을 넘어 도시 전체가 '생판 모르는 사람에게 무조건적 사랑을 준다'는 의지를 가진 한 예술가의 자장 안에 있는 듯 확장됐다. 그리고 마침내 한 남자가 그녀 앞에 마주 앉았다.

백발 남자는 그녀를 말없이 응시했다. 잠시 후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그녀 눈에 눈물이 맺히기 시작한 것이다. 눈물이 떨어질 즈음 마리나는 '예술가가 여기 있다' 프로젝트의 규칙을 깨고 그에게 손을 내민다. 그녀는 두 손으로 그의 손을 꼭 잡는다. 숨죽이듯 침묵 속에 있던 관객들은 그들을 보고 갑자기 손뼉을 치기 시작한다. 남자 이름은 울라이. 20년이 훌쩍 넘은 후, 헤어진 연인을 찾아온 것이다. 울라이는 1분이 지나자 곧 미련 없이 자리를 떠난다.

한 인터뷰에서 그녀는 울라이와 헤어지던 그때가 인생에서 몹시 고통스러운 순간 중 하나였다고 고백한다. 인생의 아주 중요한 시간의 끝, 새로운 시대를 시작하는 일이었다고 말이다. 하지만 끝없이 흐르는 눈물을 도저히 멈출 수 없었다는 게 그녀 말이었다. 20년이 넘는 시간 후, 그녀는 다시 혼자 남았고, 다음 관중이 그녀의 의자 앞에 앉았다. 잠시 숨을 고르던 마리나는 감았던 눈을 뜨고, 곧 앞에 앉은 사람을 응시하기 시작했다. 1분간의 만남, 1분 후의 헤어짐, 모든 건 순간이었다.

모든 관계는 일시적이다. 관계는 시간이 흐르면서 변화한다. 관계가 속한 사회적, 물리적 환경이 변하고 파트너들 자신의 생물학적 변화 또는 다른 변화 때문이기도 하다. 이것만큼 슬픈 진실은 없지만, 내가 아는 한 슬프지 않은 진실 같은 건 없다. 진실이 혹독하지 않다면 우리에게 거짓말은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내게 어둠 속에서 어둠을 보는 법을 알려준 사람은 H였다. 그는 내게 어떤 것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 어둠을 보고자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더 이상 빛을 찾지 않는 것이라고 말했다. 사람들은 열쇠를 잃어버린 어둠 속이 아니라, 건너편 가로등 불빛이 환한 곳에서 떨어트린 열쇠를 찾기 위해 노력한다고 말하다가, 그는 두렵더라도 어둠 속에 앉아 움직이지 않고 어둠을 응시할 수 있다면 어둠은 본래 모습을 드러낸다고 말했다. 어둠에 익숙해진 눈이 마침내 어둠 속의 어둠을 보게 된다고 말이다.

마리나와 울라이 이야기는 내게 H의 말을 떠오르게 했다. 인생의 가장 어려운 순간을 우리가 때때로 어둠에 비유한다면, 어둠 속의 어둠이란 결국 그 누구도 아닌 바로 나 자신을 응시하는 고통에 대한 비유가 아니었을까. 마리나 아브라모비치가 위대한 예술가로 한발 더 나아갈 수 있었던 건, 혹독한 이별을 겪으며 기어이 '어둠 속에서 어둠'을 보는 법을 깨달았기 때문일 것이다.

 


	여기 아티스트가 있다―안희경의 인터뷰집

내게도 MoMA에 대한 아픈 기억이 있다. 긴 시간이 흘렀는데도 그곳을 지나치는 일이 괴로울 때가 있다. 하지만 2010년 뉴욕에 있었다면, 나 역시 그녀 앞에 앉으려고 긴 행렬에 서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결국 그녀가 아닌, 그녀 눈에 비친 '나 자신'의 어둠을 마주했을 것 같다. 만약 그곳에 진정한 예술이, 예술가가 있었다면, 그것은 맑은 영매처럼 나를 내가 보고 싶어 하지 않던 차원으로 순간 이동시키는 충분한 역할을 했을 테니까.

 

 

●여기 아티스트가 있다―안희경의 인터뷰집

2015.06.13 백영옥 소설가,  조선닷컴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