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낌.../산(山)

산> 사연깃든 모악산으로,,,

흔적. 2015. 6. 7. 14:40

준비없는 성격이 또 한번 지나가다. 머리속으로만 준비물을 챙기다가 당일 등산베낭도 아닌 허접한 가방(큰녀석이 작은아이 고교입학으로 사준 책가방이 아직 쓸만하여 백으로 사용- 아이들 물품은 버리고 싶지 않다.)에 쓸어넣고 고작 물통 한병으로 길 나서다.

왕복 500KM 6시간 정도를, 오직 모악산과 금산사를 향하게.

참 무모했다. 전주 한옥마을 등 다른 구경거리도 아니하고...지인이 있었다면 有宿했을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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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부터 모악산에 가보고 싶었다.

후천개벽의 시조인 강증산의 고향과 미륵신앙의 모태인 견휜과의 유래가 있기 때문이다.

더불어 조용헌 컬럼에 강증산이  동학에 실패하고 모악에 숨어 들었다는 이야기부터...

도데체 어떠한 풍수를 가졌길래 母岳에 들어갔단 말인지. 저 넓은 김제평야를 다스리며 동학을...

 

 

 

숲은 말하고 산은 듣는다. 시간도 세월도 함께 어우러지며 나에게 묻는다. 길을 떠나라.

귀를 세우고 입은 미소만 띄라. 산은 변하지 않고 숲만 변한다. 산은 포용하고 숲은 베푼다.

사람도 변하지 않는다. 변화를 가르킬려 애써지 말라. 그냥 두어라.

길을 떠나라. 편리함이 아닌 익숙함에서 벗어나서 찾아라.

 

정상에는 대부분 송수신탑 아니면 군부대 병력. 조금 빗겨난 곳으로 설치하면 안될까?

한양에서 호남으로 내려 오는 길목 첫번째로 모악을 만난다. 모악에서 남쪽으로 보면 천관, 무등과 지리산맥이 겹겹히 보이는 것이...한양에서 오는 객을 맞이하는 호남의 첫산이라 그 모습은 진지하다.

岳이지만 巖산도 石산도 아니다. 그냥 평범한 모습으로 맞이하는 그런 산이다.

 

 

송수신처 때문에 정상석이 빈곤하다. 아주...

 

저 넓은 김제평야는 신도시로 탈바꿈했다. 조풍갑이 民을 혹사 시킨 지역이였던가? 동학의 원초가 되게 만들었던 수탈의 김제평야인가? 그곳을 보고 싶어 길을 떠났던 것인데...넓디넓은 평야에서의 수확을 개인의 축척에 쌓아 갔으니 民이 어찌 힘이 안들었겠나. 참으로 선정하는 도백을 예나 지금이나 찾기가 힘든다. 그건 사람의 마음이 같아서 그럴게다. 공익보다 사익을 취할려는.. 

아직 그 손녀는 현재도 당당히 잘 살고 있고...더구나 정치에 관여해서 어지럽혔고...

 

북쪽 아래멀리 금산사가 보인다.  보기에는 그리 멀지 않은것 같은데 막상 차를 타고 들어가니 한참이나 가야 볼 수 있다. 지금도 구비구비 들어가는데 옛날에는 얼마나 깊었을까?

 

멀리 남쪽으로는 천관산 무등산과 지리산맥이 보일 듯 한다. 굴곡많은 산맥들이다. 恨 서린듯한.

 

정상 서쪽의 모습, 호수로 인해 발달된 모습이 옛날에는 한적한 전형적인시골 모습이였을 것이다.

 

 

금산사 주차장은 두군데, 윗쪽 주차를 하고 절입구 들어서면 입장료 3,000원 비싼편이다. 가만히 보면 누군 받고 누군 안받고 - 대부분 사찰 입장료 마찬가지지만 -

금산사를 답사하고 경내 옆길로 모악산 정상 가다. 4.8KM 가장 짧은 길. 곳곳에 개울과 여우러져 발을 담글수 있어 좋을것 같다. 정상에서 하산길은 매봉으로 해서 금산사 아래 주차장으로 내려오다. 7.6KM . 하산길 등산하시는 분과 조우, 여쭈니 모악산으로 가는 길 중 가장 먼길이란다. 주차장에서 출발이라 입장료없는 관계로 우회해서 정상가는 길이다.

하산을 이 길로 택하면 개울이 없어 여름철 발한번 담그지 못하는 불편이 있다.

아마 15Km는 족히 걸었다. 허기지며...ㅋㅋ 차를 위 주자창에 두어서 가지러 올라가는 수고도 하고.

코스를 잘 선택해야지만 무던할 것 같다. 뒷편 구이면에서 올라와 대원사를 구경한 후 정상에서 금산사로 오는 길이 좋을 것 같다. 대원사는 강증산의 피신처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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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오는 길 허기져 막국수집에 들리다. 뜻밖에 맛있는 집. 내부에는 깔끔하고. 꿀꺽. 6000원,

사진찍고 먹어야 하는데 비빈 후 생각났다. 부산으로는 밀면같은 존재. 기계로 즉시 빼내어서 위에 고봉을 얹혀주는 것이. 식초와 고추냉이를 조금넣고. 시원한 맛이다. 뒷맛도 깨끗하고 감칠맛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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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구 돌멩이. 필체가 획일적인 軍의 냄새가 풍긴다. 작기도 하고. 母山치고는 어울리지 않는 듯하다.

 

웅장한 모습의 대적광전. 휴일의 토요일 한산하다.

미륵전. 봐야할 곳이다. 3층 내부가 뚫여있어 굉장히 큰 미륵이 반겨준다.

견훤이 후백제를 세우며 환생한 미륵이라고 했을때. 왼쪽 보리수 나무. 깨치기 위해서 옆에 앉아보다.

 

아마 미륵신앙을 토대로 동학을 가져갔을것이다. 서학이란 문물이 휩쓸때 民本사상과 다름없는 동학을...성리학이나 유교의 근본이 동학의 배경이 아닐까 의문이 간다. 자신의 根本도 모르는 자가 어찌 신을 경배하겠나. 주차장에서 금산사로 오는 왼쪽 조금만 서낭당이 있다. 지나치기 쉬운 곳.

이렇듯 모악산은 곳곳에 미륵신앙을 모시는 곳이 널리 있다고 한다.

 

 

닫혀있는 문이 열릴때 후천개벽을 할까? 그 오래된 문고리가 때를 기다린다.

 

 

2015.06.06 홀로여행 15Km 정도 입장료 3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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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부:

모악산 남쪽으로 오르는 길에 금산사가 있다.

미륵대불과 적멸보궁 등이 있는 금산사는 넓은 터에 자리잡은 상당히 규모가 큰 사찰에 속한다.

금산사 원래 절터는 깊이를 측량할 수 없었다.

좋은 터엔 원래 용이 수행하거나 기도하는 경우가 많다. 금산사도 그러했다.

 

옛 문헌에 다음과 같은 글이 나온다.

신라 때 한 조사가 수 만 석의 소금으로 메우니 용이 자리를 옮겨 갔다.

그 자리를 닦아서 절을 세웠으며, 대웅전 네 모퉁이 들 밑에는 가느다란 간수가 주위를 돌아 나온다.

지금도 누각이 높고 빛나며, 골짜기가 깊숙하다. 또한 호남에서 이름난 큰 절이고, 전주부와 가깝다.

모악산에 올라서서 바라보면 서북쪽으로 멀리 동양 최대의 절터를 품에 안은 미륵산이 보인다.

-미륵사지의 중요성을 알아보고 준비하는 사람이 많지만 뜻이 크고 굳세지 않아 감응이 없다.

예로부터 엄뫼, 큰 뫼로 불려온 모악산은 이 산의 정상 서쪽에 자리한 쉰길바위라는

커다란 바위가 아기를 안고 있는 어머니의 모습 같아서 이름 지었다고 한다.

모악산은 계룡산과 더불어 우리나라 민중 신앙의 텃밭으로, 정기 어린 산으로 어깨를 겨루었으며

모악산 금산사의 봄 경치와 변산반도의 여름 경치, 내장산의 가을 단풍과 장성 백양사의 겨울 설경은

호남의 4대 절경으로 이름이 높았다.

또한 풍수지리상의 모악산은 전 지구적 후천개벽의 모산, 즉 어머니의 산이고

순창의 회문산은 양산, 즉 아버지의 산이라고 하였다. -팔공산을 부악으로 삼는다.

환생한 미륵임을 자처하며 후백제의 왕이 된 견훤이 자신의 복을 비는 사찰로 삼고 중수했다고 전해진다.

후백제의 견훤과 마지막까지 사투를 벌여 승리한 태조 왕건은 호남 차별을 명문화한 훈요십조를 남겼고, 8조에서 차현 이남과 공주강 이남의 사람은 아무리 미관말직이라도 등용하지 말라라는 말을 남겼는데, 이후 고려시대 내내 호남 지역 사람들은 벼슬길에 오를 수 없었다.

 

조선 개국후 사라지는 듯 했으나,

선조 때 전주 사람 정여립을 중심으로 조선 선비 1000여명이 희생된 기축옥사가 일어난 이후

호남은 반역의 고장이라 낙인 찍혀 등용에 제한을 받았다.

동학과 강일순의 증산 사상이 태동된 곳이기도 하다.

미륵대불 아래의 재물을 상징하고 소원을 이뤄준다는 가마솥과

금산사 옆을 돌아 조금만 올라가면 만날 수 있는 부도비 또한 놓치지 말아야 할 곳이다. 

 

출처: <전북 김제> 어머니의 품과 같이 따뜻한 모악산 금산사, 작성자: 한원